안동누정이야기 / 소호헌
누정(樓亭)이라 함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집을 일컬으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서 당(堂), 대(臺), 헌(軒)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자가 개인적 수양 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답사할 곳은 누정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헌(軒)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집이다. 헌은 한자로는 집 헌 자를 쓰고, 기능은 정침과 사랑채와 구분되는 별당의 기능을 지니며 구조는 전면을 훌쩍 들어 올린 누각형 건물이다. 별당은 주택 내에서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쓰인다. 또 다른 기능은 지역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쓰이고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중심으로서 사용된다.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속뜻은 서 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 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로 대구 서씨의 중흥조인 약봉 서성(徐渻, 1558~1631) 선생의 현달함을 비유하여 회자하는 말이다. 대구 서씨는 대구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서씨 문중이 안동에서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은 수상동 무주무마을과 일직면 망호리나 두 마을은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로 관행을 달리하고 있다. 족보에 의하면 달성 서씨의 시조는 서진(徐晋)으로 고려조에 판도판서로 달성군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고 9개의 종파를 가지고 있다. 대구 서씨는 시조를 서한(徐閈) 으로 하고 12개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 두 문중의 조상은 한 할아버지에게서 나온 한 집안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엄연히 다른 집안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달성은 대구의 옛 지명이어서 대구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문충공 서거정 등 명신을 배출하면서 서울에서 벼슬을 하며 산 사람들은 대구 서씨로 분파하고, 대구에서 고향을 지키며 산 사람들은 달성 서씨를 그대로 쓴다는 것이다.

서한을 시조로 하는 대구 서씨가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명종 때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로부터 비롯된다. 함재가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 고성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한양에서 안동 일직으로 옮겨오면서이다. 따라서 대구 서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되는 것은 안동의 명문 고성 이씨와 혼맥을 맺음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성 이씨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해의 부인인 고성 이씨가 안동에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한 사람은 경주 이씨 李暿(이희,1404~1448)의 사위인 李增(이증, 1419~1480)이다. 그는 안동은 강산이 수려하고 풍속이 순후하여 가장 살만한 곳이라 하면서 영산현감의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안동으로 전거하여 고성 이씨가 명문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 공은 슬하에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모두 재주가 남달랐다. 그중 둘째 아들 낙포 굉(浤)은 낙동강 건너편 언덕에 귀래정을 짓고 강호에서 소요했으며, 셋째 명(洺)은 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함께 사직하고 물러나 1520년 영남산 기슭에 임청각을 지었다. 선생도 슬하에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그중 다섯째가 무금정 이고(李股)이고 그의 무남독녀가 함재 서해의 부인이 되고 함재가 서울에서 안동으로 전거하면서부터 대구 서 씨 안동의 역사가 비롯된다. 또 이고의 동생인 반구옹 굉(肱)은 낙동강 기슭에 반구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다. 이처럼 고성 이씨는 낙동강을 품에 안고 임청각, 귀래정, 반구정과 같은 자취를 오늘날까지 500년 동안 홀연히 이어오면서 ‘은둔형’ 명가의 터전을 완성한 가문이다.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의 안동 정착
함재 공의 휘(諱)는 해(嶰)이고 자(字)는 정지(挺之)이며 호(號)는 함재(涵齋)이다. 중종 32년에(1537년) 출생했다. 퇴계 문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제자들만 훈학하던 중 명종 14년(1559년)에 졸했다. 아들 성(渻)의 귀로 영의정에게 증식되고 대구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배 위인 정경부인 고성이씨는 중종 34년(1539년) 출생하고 광해군 7년(1615년) 졸했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던 함재는 신부가 장님인 줄도 모르고 한양에서 안동으로 혼인을 위해 길을 나섰고, 도착하기 전에 신부가 장님이란 것을 알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이씨 부인과 혼인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혼인을 한 지 5년 만인 23세(명종 14년. 1559)에 태어난 지 1년 6개월이 된 아들을 두고 그만 요절했다. 그 아들이 약봉 서성이다.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과 어머니 이씨 부인
대구 서 씨 중흥조로 추앙받는 서성의 자는 현기(玄紀)이고 호(號)는 약봉(藥峯)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선생은 퇴계의 제자인 함재 서해의 유일한 혈육으로 안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 무금정 이고의 무남독녀인 이씨이다. 부인은 광주 목사 송영(宋寧)의 따님이다. 선생은 당시의 기준으로만 보더라도 태생이 화려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 명신인 양촌 권근의 사위인 서미성의 5대손이고 서거정의 종현손(從玄孫)이며 조부는 생원과 문과를 거쳐 예조참의직에 올랐으니 5대조 이래 대과에 급제한이 만 세 분이다. 그에 못지않게 외가도 명문이다. 외할아버지 이고는 안동의 명문가인 임청각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또한 약봉의 장인인 광주 목사 송영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일의 손자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생후 1년 반이 못 되어 부친이 2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는 25세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중부(仲父)인 춘헌공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서엄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는 없었다.
약봉은 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약봉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은 춘헌공 서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 현 서울 마포구 아현동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회가 있는 자리)으로 그곳에서 10여 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웠으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약봉의 가문에는 당시 장수한 사람이 드물어 쇠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엄은 총명한 어린 조카 약봉에게 문명(文名)을 기대했다. 이제 약봉에게 주어진 것은 재명(才名)과 수복(壽福)이었다.

약봉이 현달하게 된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이다.
약봉의 어머니는 서울 약현에다 안동 구천면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몄다. 단출한 가족임을 아는 이웃에서는 그 규모 때문에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친은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고 자신했다. 그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 이외,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이후 모친의 소망은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약봉은 어린 시절 중부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워 성장한 뒤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1586) 때 알성문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학자로서보다 관료로 더 이름을 떨쳤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의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개성 유수,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의 직도 수행했다. 그리고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중신인 고명칠신(顧命七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함경도 마천령을 넘어 회령으로 들어간 두 왕자 일행은 그곳의 반민(叛民) 국경인 등에 의해 붙잡혀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지는 참담한 지경을 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위기를 벗어난 약봉은 왕자 구출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북평사 정문부를 장군으로 추대하여 경성, 길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운다. 비록 왕자 구출에는 실패했지만 반민 일당을 주살하고 그 지역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다. 이런 사실은 일본에서 반환되어 북한으로 인도된 함경도 의병전승기념비[北關大捷碑]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서성은 문과에 급제하여 6도 관찰사와 4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계축옥사(1613)로 단양, 영해, 원주로 유배를 갔었으나 인조반정으로 해배가 되어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과 자손들은 6정승과 3제학을 하는 등 명문 일가를 이루었으며 서성의 모친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서성의 현손 여식은 영조의 정비인 정순왕후가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명문가는 이어져 한 말의 내부대신을 지낸 서재필도 그의 자손이다.
서성은 성품이 강직하여 떳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고 미천한 사람들 앞에서도 거만하지 않았으며 소실도 두지 않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모두가 모친인 고성 이씨의 바른 교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저술로는 증손자인 서문유가 주선해 간행한 약봉유고(藥峯遺稿)를 바탕으로 중간된 4권 2책이 남아 있다.
소호헌을 답사하며 느낀 것은 건축(建築, Architecture)은 건물(建物, Building)과 다르다는 것이다. 건물은 필요에 따라 단순한 건조 기술로 만드는 구조물이지만 건축은 ‘조형(造形) 의지와 이데올로기(Ideologie)가 담긴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축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개성과 인격의 실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건축은 삶을 위한 도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건축을 통해서 역사를 읽고,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거꾸로 역사를 통해서 건축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앎이란 깨달음이며, 삶이란 변화다. 위대한 건축은 그 깨달음과 변화를 담고 있다. 영원한 건축이란 그 깨달음을 전달해 주어 또 다른 앎을 가능하게 하며, 항상 변화하면서 또 다른 삶을 얻게 하는 것이다.

건물은 집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집을 매개로 벌어지는 개별적인 깨달음의 과정이고 집단적인 문화 활동이다. 따라서 역사 속의 건축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건축인들이 고민했던 생각들이며 그들이 도달했던 깨달음이며 그들이 성취했던 실천의 결과와 행위들이다. 과거의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형태나 장식이 아니고 심지어는 공간과 그 구성 방식도 아닌 지식이며 지혜이며 정신이다.” 필자가 소호헌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점에서이다.
조선 3대 현모로 추앙받는 이씨 부인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장계향’과 더불어 조선 3대 현모로 존숭 받고 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일대 결단을 하게 된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사고무친이었다. 그나마 서울에 사는 약봉의 중씨(작은아버지)인 춘헌 서엄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했다. 이씨 부인은 ‘아비 없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중씨가 사는 한양으로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욱이 당시에는 잇단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안동을 떠난 이씨 부인은 처음에는 청주에 몇 달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한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선 안 되고 한양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약봉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약봉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약봉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약봉은 자녀들에게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게 하라”면서 ‘물태위선(勿怠爲善)’을 가훈으로 삼았다. ‘착한 일을 하는 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약봉의 아들 4형제는 모두 일가를 이뤘다. 약봉 서성의 맏아들 ‘경우(景雨)’는 우의정, 다음 ‘경수(景需)’는 종친부 전첨, ‘경빈(景霦)’은 현감, ‘경주(景主)’는 선조의 사위로 네 형제가 모두 현달했고, 약봉의 후손에서 문과급제 자가 무려 121명이나 쏟아졌으며, 3대 정승으로 종태(宗泰 1652~1719. 영의정), 명균(命均 1679~1745, 좌의정), 지수(志修 1714~1768, 영의정)가 있고, 3대 대제학으로 유신(有臣 1735~1800), 영보(榮輔 1759~1816), 기순(箕淳 1791~1854)을 내고, 규장각에 업적을 남긴 3대 학자로 명응, 호수, 유구 등을 배출함으로써, 여기 소호리에서 터전을 닦은 경파 서씨는 나라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서성의 큰아들은 우의정직에 오르고 그의 손자 문중은 영의정직에 올랐다.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은 넷째아들 경주(선조의 딸과 결혼)의 후손에게서 나왔다. 그의 후손에게서만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을 배출했다. 여기서 3대 정승이라 함은 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정1품의 관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직에 오른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3대 정승을 낸 집안은 대구 서씨 외에 청풍 김씨, 청송 심씨가 있다. 다만 대구 서씨는 3대 정승에 이어 바로 3대 대제학까지 배출했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이다.
이씨 부인은 안동에서 안분지족하며 살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단행하면서 대구 서씨 가문을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생계를 위하여 감칠맛 나는 청주를 빚어 팔았고, 밤․잣․호두 등을 넣은 찰밥과 유밀과는 맛이 좋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도승지가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을 갖고 들어가 임금에게 진상을 하자 임금은 맛을 보고 ‘천하의 진미로다!’ 하고 ‘약주’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살던 곳의 지명 약현의 약자를 땄다고도 하며, 아들의 호가 약봉이라 해서 ‘약밥’ 혹은 ‘약주’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호헌(蘇湖軒)과 약봉태실(藥峰胎室)
소호헌이 자리 잡은 마을은 소호리이다. 지명은 마을 서쪽에 넓은 호수가 있고, 고려 때 시랑을 지낸 소씨가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소호리라 불렀다. 문헌에 의하면 소호리는 울창한 송백 숲의 시원스러운 전망과 아름답고 호탕한 풍광에 이끌려 원근의 선비들이 별서(別墅)를 두고 소요했으며 류경심, 장문보, 김용 같은 명류들도 여기서 살았다고 전한다. 대구 서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함재 선생이 고성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이다.


용마루 망와에 새겨진 승천하는 듯 용트림하는 두 마리 용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용 문양은 왕을 상징하여 아무 데나 새기지 못한다. 소호헌 망와에 새겨진 용은 명문가를 세우고 자손만대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주인의 마음이 깃들어져 있다. 망와에 깃든 쌍용의 상서로움 때문인지 함재와 이씨 부인의 자손들은 명성을 크게 떨쳤다. 소호헌 동편, 함재의 아들 약봉 서성이 태어난 태실이 있다. 소호헌 앞마당에는 순국지사 서상부(徐相孚. 1840~1896.10.13.) 선생의 기적비를 마주할 수 있다. 선생은 을미년(1896)에 의성 봉산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셨고,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