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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로 넓어졌어도 서울은 조선의 外四山 안쪽

돌까마귀 2023. 11. 13. 19:46

조선 수도로 일제강점기, 강남 개발 거치며 팽창한 서울1987년 이래 ‘국토 균형개발’ 위해 확장 억제

서울은 왕도(王都)이자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고, 한양(漢陽)은 신라 진흥왕 때 한양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생긴 뒤 세월이 흐르면서 한산(북한산) 이남 한수(한강) 이북 땅에 고착된 지명이며, 한성(漢城)은 조선왕조 수도(서울)의 이름이다.

 

1910년대 서울 도성 안 사진. 옛 서울은 내사산과 성저십리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1392년 새 왕조를 개창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성 쌓을 자리를 물색했다. 논란 끝에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하고 목멱(木覓)을 안산(案山)으로 하며, 낙타산과 인왕산을 각각 좌청룡 우백호로 하는 도성의 터가 결정됐다. 이 네 산의 능선을 잇는 선에 도성을 쌓았으니 그 안쪽이 한성부(漢城府)였다. 다만 성벽을 기준으로 10리까지는 한성부의 행정 관할구역으로 삼았다. 이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했다. 북쪽으로 북한산, 동쪽으로 용마산, 서쪽으로 덕양산,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는 권역으로 대략 현재의 서울 강북 지역 전체에 해당한다. 풍수상으로는 도성으로 이어진 네 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 성저십리의 경계인 세 개의 산에 한강 이남의 관악산을 더해 외사산(外四山)이라고 했다.

 

용산 이어 고양·시흥·김포 일부가 편입

한성부에 성저십리를 둔 것은 중세에는 어떤 도시든 인근 지역과 생태적·유기적 관계를 맺어야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채소·육류·생선 등 신선식품이 신속히 공급돼야 했고, 건축과 난방을 위한 채석장과 벌목장도 필요했다. 군사, 통신, 의장(儀仗) 등에 필요한 말 목장과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이 묻힐 묘지도 있어야 했다. 성저십리는 한성부를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한 필수 시설이자 권역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한성부 안의 호수(戶數)는 1만7012호, 성저십리의 호수는 1779호였다. 병자호란 이후 도성 동쪽에 있던 말 목장 상당수가 폐쇄되고 상경하는 유민이 늘어나며 경강(京江) 상업이 발전하는 등의 변화에 따라 한성부와 성저십리의 인구는 급증했지만, 그 권역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1911년 4월1일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수도’의 지위를 박탈해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경성부 내부는 5부, 과거의 성저십리 지역은 8면으로 편제해 관할 권역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1914년 4월1일,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경성부 권역을 조정해 8면 중 극히 일부를 경성부에 직할시키고 나머지는 경기도 각 군이 관할하도록 했다. 이때 1880년대부터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된 용산과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신용산 일대가 경성부에 편입됐다. 이로써 경성부의 지도상 면적은 16.5㎢에서 36.18㎢로 두 배 이상 확장됐으나 실제 행정 관할구역은 8분의 1 정도로 줄었다. 인구는 용산 주둔 일본군을 빼고 24만6천여 명이었다.

3·1운동 이후 경성부 인구는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 경작지를 잃은 농민과 근대교육을 받으려는 지방 청년의 서울 이주가 늘어났다. 세계대공황 이후 조선총독부가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등포, 왕십리 등지에 공장도 늘어났다. 1930년에는 경성부를 ‘국제도시’로 발전시킨다는 도시계획이 입안됐고 1934년에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공포됐다. 중일전쟁 한 해 전인 1936년 4월1일, 총독부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대폭 확장했다. 이때 고양군·시흥군·김포군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돼 면적이 네 배 정도 늘었고 인구는 60만 명을 넘어섰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이후의 서울 영역 변화

 

자유를 빼고 ‘서울특별시’가 탄생하다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은 경성과 인근 지역의 인구 증가가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침략전쟁 도발을 앞두고 경성 인근의 소비재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재편하는 한편, 경성부민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통제를 강화하고, 군수물자를 단시일 내에 전선(戰線)에 보급할 수 있는 광역 유통망을 수립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때를 전후해 노량진·청량리·마포 일대에 군사용 도로 개착 공사가 진행됐고 청계천 복개, 지하철 건설, 고가도로 건설 등의 계획도 수립됐다.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과 군수 관련 산업체 증가에 따라 경성부 내 인구는 계속 급증했다. 1936년 60만여 명이던 인구는 1942년 100만 명을 돌파했다.

해방 이후 경성부의 일본인 20만여 명은 귀환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전재민(戰災民)과 월남민이 서울로 이주했다. 일본인이 두고 간 ‘자리’를 노리고 상경하는 지방민도 줄을 이었다. 1946년 8월10일, 미군정은 ‘서울특별자유시 헌장’을 발표했다.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하고 경기도의 관할권과 관계없이 ‘특별히 자유롭게’ 행정을 펴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서울 사람들에게만 자유를 주고 다른 도시 주민들에게는 자유를 안 주겠다는 거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군정청은 ‘자유’ 두 글자를 빼는 것으로 대응했다. ‘서울특별시’라는 이름이 탄생한 연유이다.

정부 수립 한 해 뒤인 1949년 8월15일, 서울특별시 권역은 다시 확장됐다. 고양군 관내에 있던 독도(뚝도=뚝섬)면, 숭인면, 은평면 일대와 시흥군 관내의 번대방리, 도림리, 구로리 등이 서울에 편입됐다. 하지만 이 확장은 반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1·4 후퇴로 서울 전역이 ‘소개(疏開) 지대’가 됨으로써 별 의미 없는 일이 됐다. 휴전 이후 서울 인구는 다시 폭증세를 보였다. 5·16 군사정변 이듬해인 1962년 12월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서울특별시·도·군·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1963년 1월1일부로 양주군의 구리읍과 노해면, 광주군의 구천면·언주면·중대면·대왕면, 김포군의 양동면과 양서면, 부천군의 오정면과 소사읍, 시흥군의 신동면 등 서울 북동부와 한강 남쪽의 광대한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268.3㎢에서 596㎢로 두 배 이상 넓어진 서울 권역은 ‘공교롭게도’ 조선시대 외사산 안쪽 지역에 해당했다.

 

1966년 4월 공사 중인 제3한강교로 뒤로 옛 압구정동의 모습이 보인다.

 

강남 개발의 실마리가 된 1963년 한강 남쪽 편입

한강에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광진교밖에 없는 형편에 군사정부가 한강 이남 지역을 서울로 전격 편입한 이유에는 당시에도 의혹을 품는 사람이 많았다. 이름은 같은 서울이지만 당시의 강북과 강남은 사실상 격절(擊節)된 공간이었다. 한강 이북 동서북쪽으로 확장해도 되는데 하필 나룻배 타고 다녀야 하는 강남이라니. 강남의 국유지를 불하받은 고위 군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군사정부가 북한의 재침에 대비해 수도를 강남으로 옮기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 배제할 수 없지만, 구체적 계획안은 박흥식이 제공했다.

군사정변 직후 군부는 ‘부정 축재’ 혐의로 기업인들을 체포해 ‘국가 재건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풀어줬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가의 대표 격이었고 정부 수립 직후 반민특위에 검거됐던 박흥식은 풀려나면서 서울 인구 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 계획을 구상해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박흥식은 미국, 유럽, 일본을 돌며 신도시 건설에 필요한 차관 도입 협정을 체결하고 서울시역이 확장되자마자 서울시에 ‘남서울 도시계획사업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한강 이남 2410만 평의 땅에 11년간 270억원을 들여 신도시를 조성해 32만~48만 명을 유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정부는 외자 도입으로 개발비를 충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1966년 1월, 서울시는 ‘남서울’을 독자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말부터 청구권 자금의 일부로 일본에서 들여온 건설 중장비 400대가 여의도와 ‘영동’(永東)으로 명명된 영등포 동쪽 일대의 땅을 헤집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의 욕망이 집결하는 ‘강남’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 인구 증가가 강남 개발의 동기였지만, 개발은 다시 인구 집중을 부추겼다. 서울 인구는 1970년 500만 명을 돌파했고, 1978년에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매년 40만 명씩 늘어난 셈이다. 이 무렵부터 서울의 ‘과잉성장 도시화’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전 국토의 0.1%도 안 되는 땅에 20% 가까운 인구가 모여 사는 것은 ‘과잉성장’을 넘어 ‘비정상’에 가까웠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새로 제정된 헌법은 ‘국토의 균형 있는 개발, 이용, 보전’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했다. 1972년과 1995년 행정구역 조정 차원에서 경기도 권역의 극히 일부가 서울에 편입되기는 했지만, 새 헌법 제정 이후에는 서울의 확장을 억제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역대 정부의 일관된 목표였다. 200만 호 주택 건설 공약에 따라 분당, 일산, 평촌, 산본의 4개 신도시를 건설한 노태우 정부도 이들 지역을 서울에 편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의 권역은 ‘외사산’ 안쪽으로 유지됐다.

 

1970년 양택식 서울시장은 영동 신시가지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김포의 서울 편입은 ‘균형발전’을 규정한 헌법에 부합하나

김포를 비롯한 인근 소도시들의 서울 편입을 공약한 국민의힘에 묻는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시대에 서울 확장이 ‘균형발전’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한 헌법에 부합하는가? 또 2004년 ‘서울은 관습헌법상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판시한 헌법재판소에 묻는다. 수도 서울의 역사적·문화적·관습적 권역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전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