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까마귀(石烏) 창작글 모음

비오는 오후, 추억에 젖어 든다

돌까마귀 2022. 7. 30. 10:36

나어릴적 배고픈 시절엔 비오는 오후가 아주 좋았다

맑은 날의 바쁜 일상이 비오는날 만큼은 해방 되었으니까

 

*   *   *

 

국민학교든 중학교든 청소당번까지 마치고

부모 형제 모두 들일 나가시고 아무도 계시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면

실겅위 삼배 보자기 덮힌 삶은보리쌀 소쿠리를 내려

한 귀퉁이에 담겨있는 식은밥을 양푼에다 담고

차디찬 우물 물 한바가지 퍼 담아 말고

마당 한켠 채전밭에서 풋고추 한웅큼 따고

장독대에서 제일 커 내 작은 키를 얕보는 된장독에서

어렵사리 한숱갈 퍼내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시장끼를 떼우기 바쁘게 찬도랑 방천둑에서

쇠파리때 쫏느라 꼬리 흔들기 쉴틈이 없는

누렁이 고삐를 풀어 몰고

옆집 점태도 앞집 상식이형도

황보네 순덕이 누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뒷산 기슭으로 꼴망태를 매고 간다.

 

모갈비얄에 다달아 고삐를 사려 놓아주면

요령소리 딸랑이며 누렁이는 숲속으로 들어가고

날 시퍼런 조선낫 바삐 움직여 소꼴을 베다보면

해는 어느듯 서산으로 넘어 가고 꼴망태도 거의 찾으니

두손가락 입에 물고 휘파람 한가락 휘~익 불면

운 좋은 날에는 길다란 머루넝쿨도 목에걸고

딸랑 딸랑 요령을 흔들며 누렁이도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어스름이 남는다면

너바리 영감네 콩밭의 콩서리도 추억거리

순덕이 누나를 망 새워 놓고

밭고랑을 더듬어서 잘 영근 콩대를 한아름 뽑아오면

점태는 재빠르게 솔가지를 꺽어오고

상식이형은 봉창속 찌포라이타로 불을 붙인다

군침을 흘리며 콩깍지 터지는 소리를 기다리다

모두가 둘러앉아 잿불을 헤집으며

까맣게 그을린 콩깍지 골라 손바닥에 비벼먹는 꿀맛이란

 

서로의 검정 묻은 얼굴을 보며 깔깔대고 키득거리다

어두워진 찬또랑 방천길 지나 마을길에 들어서면

우리집 처마끝의 호야불이 빛나고

행주치마 앞에 두른 예쁜 누나가 반겨준다

외양간에 누렁이 넣고 꼴망태 여물통에 비우고 나면

시장끼를 참고 들일 나가신 부모님과 형을 맞으러

사립문 돌아 둥구나무 밑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기다리며

서편 하늘에 걸린 눈썹달을 찾다보면

들일 마치고 돌아오신 아부지가 "소꼴 많이 비왔냐?"하신다.

 

마당 한가운데 들마루에 두리상 펴 놓고

숫가락 젓가락 가지런히 하고 양념장과 열무김치 올리고 나면

가녀린 우리 누나는 구수한 칼국수가 담긴 양은솥을 들고 오며

"아부지 진지 잡수이소" 소리친다

마당 한켠에서 모깃불 지피시든 아버지도

우물가에서 형 등목 시켜주시던 어머니도 입 맞추어

"그래 얼른 묵자 배고프제?" 

 

 

*   *   *

 

비오는 날 찢어진 비닐 우산 쓰고 학교 같다 오면

사립문을 들어서는 순간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아궁이에 희나리를 때는 형과

부뚜막에 올라 앉아 주걱으로 가마솥을 휘젖는 누나와

풍로에 솥뚜껑 뒤집어 걸어놓고 부칭개 부치시는 어머니와

툇마루에 걸터 앉으셔서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기울이시며

장죽을 입에 무신 아버지께서 어서오라 반기신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밀볶는 냄새속에는

그보다 더 구수한 사람냄새가 섞여있고

외양간 누렁이는 열심히 되새김질을 하며

오늘은 편히 배 깔고 앉아 두눈을 꿈벅이니

 

애호박에 풋고추 썰어 넣고 부친 호박전은 아버지꺼

골파에 돼지비게 썰어 넣은 파전은 형아꺼

애호박 싹뚝 썰어 부친 동그란 부친게는 내꺼

신김치 넣고 부친 김치전은 엄마와 누나꺼

가마솥 밑바닥에서 식기를 기다리는 볶은밀은 우리 모두꺼

 

비오는날 오후는 모두가 쉬며 식구끼리 오순도순

예기꽃 피우며 풍년을 기다리는데

소나기 줄기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미꾸리가 떨어져 마당에서 꿈틀데니

내일도 비가오면 소먹이러 가지않아 좋을텐데

 

 

2008.8.16

빨간 풋고추 파전에 생막걸리 한잔들고

돌 까마귀 추억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