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와 추억여행

보문산의 남녘, 구완동에서 절고개 넘어 이사동 지나 호동으로

돌까마귀 2023. 12. 12. 20:25

언   제 : 2023년 12월 10일 일요일

어디서 : 대전 중구 구완동에서 절고개 넘어 동구 이사동 찍고 호동으로

누구와 : 대전향토문화연구회+ 비영리단체 '대전둘레산길잇기'의 회원님들과 함께

 

8시 40분에 대전역 동광장을 떠난 33번 구완동행 버스는 기사님 말씀대로  버스노선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승객이 타셨으니

계백로-문화로-대둔산로-보문산로-사정공원로를 지나 오-월드 회전교차로에서 산서로에 올라선 버스는 버드내와 함께 달리다

침산교를 지나며 유등천과 헤어져 구완천 물길을 따라 운남로로 이름 지어진 길을 달려 구완동 종점에 닿았다.

대전지명지에 따르면 외구의 침범에도 이곳 사람들은 모두 무탈하여 완전이라 불리다가 우렁골 남쪽 완전고개 너머

동구 소호동에 완전마을이 또하나 생겨 구별을 위해 '신완전', '구완전'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절도 아니고 기도터도 아닌 묘한 이름의 '옴사' 주차장에서 개인소개를 마치고

'대전향토문화연구회와 대전둘레산길잇기의 발전을 위하여'를 힘차게 외치고 도보답사여행을 시작한다.

옛길을 따라 얕은 고개를 넘어 어청골에 올라서니 

오른편으로 대전광역시 기념물  34호 구완동청자가마터 (舊完洞靑磁가마터) 나타난다.

<문화재청 우리지역문화재 설명문 퍼옴> 구완동 청자가마터는 보문산 뒤편 무수동의 유회당(有懷堂)으로 가는 입구에서 약 3.5㎞ 가량 들어간 어청골 마을 서편구릉에 있다. 이 유적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해 청자가마터 2기(基)와 기와가마터 1기가 확인 되었다.
그중 청자 1호 가마터는 연소실, 소성실, 배연부굴뚝까지 대부분의 구조가 노출되어 전체적인 구조 파악이 가능했다. 확인된 가마는 전체 길이 17.5m, 내부 너비 110~120㎝에 바닥 경사도는 22~25°로 비교적 가파른 경사에 가마를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배연시설은 소성실 끝부분을 냇돌로 마감했는데 당시까지 이러한 구조는 청자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바 없다. 2호 가마터는 유구(遺構)의 반이 집 밑으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인 조사가 불가능했으나 1호 가마터와 유사한 크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기의 청자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기에 운영된 가마로 추측할 수 있었다. 생산된 기종(器種)은 다양한 편으로 발(대접), 접시, 잔 등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완, 반구병, 매병, 뚜껑, 유병, 항아리, 대반, 주자, 정병 등 각종 용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의 가장 큰 특징은 틀에 대고 눌러 문양을 찍어낸 압출양각기법(壓出陽刻技法)으로 제작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장식은 문양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음각문양일 경우 연판문(蓮瓣文), 만자문(卍字文), 하엽문(荷葉文), 앵무문, 봉황문 등을, 압출양각문양인 경우에는 화훼문, 초엽문 등을 표현했고, 흑상감한 뇌문(雷文) 청자편이 한 점 발견되기도 했다.
생산품들은 연대가 알려진 태안 마도 일대의 수중 발굴된 청자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전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구완동의 청자 가마는 고려 중기에 대전 일대의 도자 수요에 부응해 운영된 생산시설로 대전 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가마이자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참을 살펴보다 길을 나서니 아래 사진의 내외분이 쓰시다가 5년 전에 바깥양반이 돌아가시고

지난 봄에 안양반까지 요양원으로 들어가시어 길가에 방치 된 녹쓴 경운기에 올라 옛 추억도 돌려본다.

멋진 소나무 3그루가 있는 삼거리 왼쪽 길은 돌고개를 넘어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로 가는 길이고

오른 쪽으로 내려서면 어청골이라 불리는 아주 옛스러운 마을이 나타난다.

어청골의 청룡골천 사방댐 밑 정자에 주막집을 차려 기력충전을 하고

구 한말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이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집터도 둘러본 뒤

위 사진은 2020년 12월에 찍은 사진으로 지금은 대문마저 없어졌다.

청룡골천을 건너 사라니골로 들어가

절고개를 향하는 길섶은 맷돼지들이 분탕질을 해 놓았고

옛 절터를 향하는 길엔 낙옆이 푹신하게 깔려있다.

구 한말까지 절이 있었다가 소실되어 동래정씨의 문중묘지로 변한 절터에는 

멧돼지들이 진흙 목욕을 할 만큼 샘이 여러 곳에 있어 개울에는 민물가재와 개구리가 많이 산다.

한참을 둘러보며 무덤 속의 남녀 자리와 묘비문의 남녀자리가 왜 다른지 토론도 해 보고

낙옆이 두껍게 깔린 된비알을 조금 올라서니 

동구 이사동으로 넘어가는 절고개 마루이다.

경계선을 기준으로 북쪽 중구 땅에는  왼발 하나 오른발 하나를, 남쪽 동구 땅에는 오른발 두개를 놓고 사진도 한장 찍은 뒤

급경사 목계단 길과

푹신한 낙옆 길을 내려서니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구완터널로 막힌 또 하나의 고갯길 끝자락에 내려선다.

오른쪽 눈 앞에 우뚝 선 오도산은 구 한말 의병장 이규홍 선생의 전적지이다.

 저 멀리 대전에서 제일 높은 식장산이 손짓하고

한천과 사우당 앞을 지날 계획을 변경하여 

고속도로 굴다리 밑을 지나서

봉강정사 앞으로 내려가

구도동 누리길이 시작되는 물레방아골로 들어가

소화동천 앞에서 주막집을 차려 기력을 충전한다.

소화동천(小華洞天)

수석당(壽石堂) 송창재(宋昌在 1880-1946)가 바위에 새긴 글로 '작은 화양동처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는 의미이다.

송창재 선생은 이규홍 의병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왜병에게 여러차례 끌려가 문책을 받았는데 후손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바로 밑(아래 사진)에서 용왕제를 지냈다고 한다.

바위에 새긴 글을 '가을하늘 김민섭'님은 이렇게 해독을 하셨다.

되돌아 내려오며 봉강정사에 들러 철책 한켠에 놓여있는 옛 광영지 표석도 살펴보고

봉강정사 마루에 걸터앉아 단체사진도 남겨 본다.

가을하늘님의 해석에 의하면 봉강정사(鳳崗精舍)는 송병화(1852-1915)가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1896년(고종 33)에 노적봉 봉암 아래 지은 학당으로, 1976년 유림들이 전면 보수하였다. 송병화의 호는 난곡, 약재이며, 자는 회경이다. 송조식의 아들로 사우당 송국택의 9대손이며, 고조는 한천 송성준이다. 난곡 송병화는 율곡과 우암의 학풍을 이어받은 성리학자이다. 간재 전우(1841-1922)와 23회의 학문적 문답 왕복서를 주고받았으며, 난곡집이 전해지고 있다.

봉강정사는 백록당(白鹿堂)의 현판으로서, 일창 유치웅(1901-1998)의 글씨이다.

아쉽게도 봉강정사 현판 양쪽에 걸려있던 '영귀대'와  '의두헌' 현판이 2020년 부터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나도 모른다.

봉강정사 왼편의 방화실(倣華室) 현판은 “영귀대(詠歸臺)”라 적혀있으며, 이는 논어 선진편에서 따온 것으로 담당 송우용(1863-1941)의 글씨이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모춘자, 춘복기성, 관자오륙인, 동자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명과 아이들 육칠명과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다 돌아오겠습니다.

봉강정사 오른편의 앙려재(仰廬齋) 현판은 “의두헌(依斗軒)”이라 적혀있는데, 이는 두보의 추흥팔수(秋興八首) 중에서 따온 것으로 덕천 성기운(1877-1957)의 글씨이다.

每依北斗望京華 매의북두망경화

날마다 북두성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네

뒤편의 孔子, 朱子, 宋子 三賢의 영정을 모신 동로사(東魯祠)와 

송병화의 영정을 모신 오적당(吾適堂)도 살펴보고

광영지 못둑으로 돌아나와

외부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이름이 갉혀 나간 사연많은 광영지 표석도 살펴본다.

최덕신(崔德新)

평안북도 의주 출생.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동오(東旿)이다. 1936년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복무하며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이듬해 1946년 육군사관학교 특별반 과정을 마치고 1949년 미국 포트릴리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이듬해 미국 포트베닝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6·25전쟁 때 제8사단과 제11사단의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지리산토벌군으로 거창양민학살사건에 관여되었다. 1953년 휴전협정 때 국군소장으로 UN군사령관 클라크(Clark,M.W.)장군을 보좌하여 휴전협정조인에 관여하였다.

1956년 육군중장 예편 후 주베트남공사, 5·16군사정변 후 1961년 10월부터 1963년 3월까지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외무부장관 재임 중 1961년과 1962년 UN총회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1963년 주서독대사를 역임하고 1967년부터 제7대 천도교 교령을 맡았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이듬해 새인간연합회 총재, 1971년 종교협의회 회장과 한중문화친선협회 회장 그리고 3·1국민회 회장, 1973년 유신학술원 회장과 국제라이온스309A지구 총재, 1974년 반공연맹 이사 등 요직을 거쳤다.

그 뒤 천도교계에서 실권이 박탈된 뒤 박정희 정부와의 불화로 197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1년 6월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1986년 9월 아내 유미영과 함께 북한애 정착하여 같은 해 10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9년 3월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 위원장,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 위원장, 같은 해 5월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 남북합작을 내세우며 남한정부 공박에 앞장섰다.

저서로 『내가 겪은 판문점』·『인면혈전기(印緬血戰記)』·『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 등이 있다.

은진송씨 제실이 즐비한 이사로194번길을 돌아 나와

이사로 166번길을 지나

이사로122번길에서 북쪽 얕은 골짜기로 들어서면

자느리고개를 넘어 중구 호동의 모암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자느리 고개마루에서 오른쪽의 동북방향 능선을 타고 오르 내리막을 반복하여 나가면

중구 옥계동 84번지 목은 이색 대전 영당에 닿는다.

애초에 이곳에 있던 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되어 유성구 상대동의 대전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현재 이곳에는 모사본이 모셔저있다.

이색 초상 - 대전영당본 (李穡 肖像 - 大田影堂本)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