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와 추억여행

동춘당 송준길 불천위 제사 참관기

돌까마귀 2024. 1. 12. 12:15

언   제 : 2024년 1월 12일 (음 癸卯 12. 2) 00:00

어디서 : 대전 대덕구 송촌동 192 동춘당종택에서

누구와 : (사)대전문화유산울림의 이창남 상임이사, 김연실 이사와 함께

 

송준길(宋浚吉,1606.12.28~1672.12.2)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은 조선 후기의 문신·유학자·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중의 한 사람이다. 노론. 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 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南人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의 아들이며 딸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민진원, 민진후의 생모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친척이며 류성룡의 문인인 정경세의 사위이다. 처수는 이의활의 딸로, 이언적의 증손녀다. 남인의 영수 허적과는 먼 인척간으로 사위 민유중의 외외종숙이 된다.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송이창, 김장생, 정경세, 김집의 문인이다.

 

2024년 1월 11일 (음 12.1) 23:09 동춘당 종택으로 들어가

 

사랑채에서 환담을 나누다가 신위를 모시러 모두 사당으로 나간다.

 

2024년 1월 12일 00:03 동춘당 불천위(不遷位) 사당

 

제주 재배(祭主 再拜)

 

분향(焚香)

 

출주고사(出主告辭)

 

봉주(奉主)

 

안채 대청마루에 진설(陳設) 되어있는 제상 뒤 교의(交椅)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개독(開櫝)

 

분향강신(焚香降神)

 

참신례(參神禮)

 

초헌례(初獻禮)

 

헌작(獻酌)

 

육적(肉炙) 진설, 독축(讀祝),  재배(再拜)

 

퇴주(退酒)

 

아헌례(亞獻禮)  헌작

 

육적을 어적(魚炙)으로 교체 후 재배

 

종헌례(終獻禮)  헌작

 

어적을 치적(雉炙)으로 교체 후 재배

 

유식(侑食)  첨잔(添盞) 삽시정저(揷匙正箸)

 

합문(闔門) 후 퇴청하여 시식(匙食)을 기다리며 환담

 

삼희흠(三噫歆 기침3번) 후 개문(開門)  퇴갱진다(退羹進茶)

 

사신례(辭神禮)

제주 이하 모두 재배 후 낙시저(落匙箸 수저를 내리고) 합반개(闔飯蓋 밥 뚜껑 등을 닫고 ) 퇴주(退酒 술잔을 내리고) 

 

분축(焚祝) 후  신주를 합독(闔櫝 뚜껑 닫기)하여

 

봉신주우묘(奉神主于廟 신주를 사당으로 모심)

 

00:40 철상(撤床) 후  참사자 모두 사랑채로 이동하여 음복(飮福)을 하니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화주 향기가 종택을 덮는다.

 

<문화재청 홈피 우리지역 문화재의 설명문>

국화주(菊花酒)는 대전지역 대표적 문중인 은진송씨 동춘당 종택(恩津宋氏 同春堂 宗宅)에서 전승적으로 제조되어 제주(祭酒), 접빈(接賓)의 용도로 사용되던 가양주(家釀酒)로 주식시의(酒食是儀), 우음제방(禹飮諸方) 등 문헌에도 기록이 있는 가치 있는 무형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