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바로 알기 60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2021년 8월 2일자 심규상기자의 기사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고 김재현 기관사 참여 작전·사망일 등 재확인 자료 나와... "보훈처 정보 정정해야" *사진 / 2015년 대전역 동광장에 세운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 김재현 기관사(가운데)와 증기기관차 석탄 공급용 삽을 쥔 현재영 보조기관사(오른쪽), 그리고 '통표'를 든 황남호 보조기관사(왼쪽) 국가보훈처 등이 6.25 당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해 순직했다고 소개한 고 김재현 철도기관사가 참여한 작전은 사실상 딘 소장 구출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 김재현 기관사의 사망일도 7월 19일이 아닌 7월 20일로, 김 기관사가 몰던 기관차도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3-219호'로 재확인됐다. 그동안 지역에서 김 기관사..

'대전전투기념주화'의 '대전전투'사진, 그곳은 대전이 아니었다

기관총으로 다리를 겨누고 있는 미군들. 멀리 보이는 첩첩산중 산세는 낯익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20일 미8군 소속의 소레이스(Sorace) 일병이 남한 땅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 찍히기 전 또는 이후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기관총에서 총알이 난사되고 누군가 총알에 맞아 피를 흘리는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곳은 어디일까? 원본 사진 설명에는 '강 건너편 산마루와 교량을 겨누고 있는 기관총 진지'라고 돼 있다. 그동안에는 대전 전투가 벌어진 대전 서구와 유성구를 가로지르는 갑천 어디쯤으로 추정했었다. 소레스 일병이 직전에 찍은 사진이 인접한 현 세종시인 연기군 남면 대평리이기도 했지만, 7월 20일 미 24사단이 갑천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일상을 밝혀준 작은 불빛 성냥 이야기

박물관 속 작은 전시 / 성냥 2023년 1월 24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열린다. 따뜻함이 그리운 추운 겨울철, 한때 우리 생활의 필수품으로 불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던 ‘성냥’ 성냥 이전에 불을 피우는 방법은 부싯돌이나 쇳조각을 사용하여 주로 마른 쑥이나 면섬유로 만든 부싯깃에다 불을 붙여 써오던 자연발화 방식으로,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부싯깃이나 부싯돌을 담는 용도인 ‘부시쌈지’도 이번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자연발화 방식에서 보다 쉽게 불을 얻을 수 있는 ‘성냥’은 1680년 영국의 화학자 로버트 보일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으며, 인화성 물질을 바른 나뭇개비와 종이를 긋는 마찰로 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우리나라에는 1880년대 후반 성냥이 처음 들어왔고, ..

2022년 대청호 해넘이와 해맞이를 겸한 송년의 밤 안내

*언 제 : 2022년 12월 23일 금요일 *어디서 : 대전 동구 신촌동 333-17 방축골 고래바위 펜션 *누구와 : 대전둘레산길의 국가숲길 지정을 축하하는 산꾼, 길꾼들과 함께 *어떻게 : 지하철 판암역 1번출구에서 출발하는 25승 버스 타고 *참가비 : 20,000원 (대전둘레산길 발전 기금) *12월 23일 금요일 오후 1시(노란색 버스) 3시, 5시(밤색 버스), 7시(노란색 버스) 4회 운행 *노란색 버스 75바8590 기사휴대폰 010-6402-8720, 밤색버스 74너5141 기사휴대폰 010-9413-4242, *12월 24일 토요일 아침 7시(노란색 버스) 해맞이 참가용 1회 운행 *12월 23일 금요일 밤 10시 밤샘 않는 분들 귀가용 판암역까지 1회 운행 *12월 24일 토요일 아..

일제강점기 대전의 治水事業 흔적을 찾아서

언 제 : 2022년 12월 11일 일요일 어디서 : 대전 동구 원동과 대동천, 이사동 그리고 중구 석교동, 구완동, 무수동, 부사동에서 누구와 : 대전향토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 팀과 함께 1900년대 대전 지형도 1902년 대전도시계획도 1910년 대전역 주변 대동천 계획도 1928년 대전역 주변 / 소재호가 없어지고 대동천이 뚫렸다 대전 시가지의 根原 / 대전 동구 원동 30번지와 31번지에서 아무 곳에나 볼일 보지 마세요~ 대동천 가제교에서 대동천 동광교에서 대동천 제1치수교에서 이제 부터 사방공사의 흔적을 찾아서 출발 / 현 대전 중구 대사동 목재문화체험관과 주차장, 보운대가 있는 곳 석교동주민센터 주차장에서 이사동 모암골에서 모암약수터에서 보문산 행복숲길을 돌고 돌아 무수동 배나무골에서 조~기 조..

인동시장에서 중앙시장 지나 여행자 쉼터로

매월 세번째 월요일 저녁에 열리는 "대전향토문화연구회"의 초청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100여년 전 우렁찬 만세소리와 태극기 물결이 펄럭이던 옛 인동시장 자리의 "인흥상가아파트" 1층을 둘러 보았다. 미곡상이 떠난 빈 가게의 굳게 닫힌 셔터에 그려진 그림은 옛 추억을 되 살려 주는 영낙없는 그 때 바로 그 모습이다. "대전천 동로"를 따라 인창로와 대흥로를 건너서니 헌 책방들이 반겨주고 중앙시장에 닿으니 "화월통"에 매달린 색색 양산이 반겨준다. 먹자골목 모서리 맛집 앞에서 눈요기를 하며 군침도 흘리다가 중앙로를 향하는데 50여년 전 "충청은행"이 첫울음을 터트린 곳을 지나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시계골목 반평짜리 가게들도 닫힌곳이 더 많다. 대전시의 무관심과 무능으로 경매로 넘어가..

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법동석장승 (法洞石長牲) 이야기

법동 석장승 (法洞 石長牲)은 장승이 아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 범천골의 돌장승(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은 1998년 대전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나무 장승이었으나 300여년전 대전 갑부 '송민노'가 지금의 돌장승을 세웠고,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돌장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天下大將軍, 地下大將軍은 장승(長栍)이 아니고 벅수(法首)라 불러야 옳다. 신라21대, 소지왕(炤知王)에 의해 서기 487년에 도입된 역참(驛站)제도의 한 부분으로, 나라의 땅과 길을 합리적으로 유지, 관리, 보수하고, 효율적으로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푯말'을 관로(官路)나 국도(國道) 길가에, 5리(里)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官)에서 세우고, 나라에서 관리를 하였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회덕에서 발원된 사회봉사와 불사이군정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실천 / 황자후(黃子厚) *생애 1363년(고려 공민왕12)~1440년(조선 세종22) 황자후는 조선 초기(태종~세종)의 문신이다. 자는 선양(善養) 또는 노직(魯直)이라 하며 본관은 회덕이다. 태종(재위 1400년~1418년) 때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인녕부사윤,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2년(태종12) 임진(壬辰)에는 호패법(戶牌法:호패는 지금의 주민등록증) 제정을, 1415년(태종15)에는 동전 사용을 건의하였다. 1421년(세종3)에는 좌군총제가 되어 정조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가 의학에 정통하고 오랫동안 전의관을 겸임하였기 때문이었다. 1425년에는 의술의 전문화와 세분화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침구의 전문직 설..

조선 초기건축부터 근·현대 양식까지 ‘역사의 보물창고’ / 대전의 건물

대전의 초기 건축 우리 대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형태상으로는 당연히 월평동 대덕대로변의 선사유적지에 있는 ‘움집’이다. 하지만 이는 근래에 형태를 고증하기 위하여 교육전시용으로 지은 건물일 뿐, 실증적 기록을 보면 대덕구 쌍청당로 17(중리동 71)에 있는 쌍청당(雙淸堂)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은진 송씨 중시조이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부사정을 지낸 송유(宋愉, 1389-1446)가 회덕으로 낙향한 후 1432년(세종14)에 건립하여 거처하던 별당으로 건물 이름은 송유의 호인 ‘쌍청(雙淸)’에서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뜻으로, 1524년(중종19)에 1차 중수를 거친 이래 총 7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이사..

루정(樓亭)의 현판(懸板)으로 보는 선비정신 / 대전 중구

현판(懸板)은 글씨나 그림을 새겨 건물의 문 위, 처마 밑이나 벽, 기둥에 다는 널판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을 총칭한다. 편액은 건물의 중앙 처마 밑에 걸려있는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칭하고, 건물에는 편액 이외에 건물의 지어진 유래를 알려주는 기문(記文)도 걸려 있는데 이러한 기문은 건물의 역사와 관련된 인물의 교류 관계를 알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누정(樓亭)에는 그곳을 들렀던 시인 묵객들이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오언절구(五言絶句)시를 담은 시액(詩額)이 걸려 있기도 하는데 건물의 기둥에 세로로 걸어 놓은것을 주련(柱聯)이라 한다. 현판을 걸어 놓는 문화는 고대 중국 진(秦)나라 때 부터 건물에 명칭을 표시하며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의 편액 중 가장 오래된..

유성구 진잠천 주변의고인돌 이야기

산책길에서 쉬던 돌이 고인돌이라고? 우리나라에는 남북한 합하여 무려 4만 개가 넘는 고인돌이 있다. 이는 전 세계의 40%가 모여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은 규모도 크고 특별해서 2000년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고 하니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지도 모를 일이다. 고인돌 보면 ‘어 저거 우리 동네 산에서도 많이 봤는데’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산책길에 널찍한 돌에 앉아 쉬엄쉬엄 쉬어가던 그 돌의자가 오래된 조상들의 무덤인 고인돌이라는 사실을 알면 버릇없이 조상 묘를 깔고 앉았다고 지하에서 노하신 분의 목소리가 들릴 듯도 하다. 유성의 계산동과 학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암탉을 닮은 빈계산에는 삼한시대 마한의 54개 부족국가 중 하나인 신흔국이 있었다. 수많은 고인..

별이 쏟아지는 진잠 별밭마을과 鶴이 날아드는 학하동 이야기

별들이 쏟아져 별이 되어라 진잠의 ‘잠(岑)’은 ‘작지만 높이 솟은 산’이란 뜻이다. 구봉산을 가리킨 것으로 바위 봉우리라 하여 진잠이라 불렀다. 그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지금의 학하동이고 이곳의 옛 이름이 성전(星田)리였다. ‘별밭’으로 불리는 이곳은 북극성이 떨어진 밭이라고 해서 추성낙지라고도 불렸다. 추성이란 중심이 되는 별로 북극성을 말한다.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이곳 별밭에 머물면서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 떨어진 곳이라 확인하면서 추성낙지라 불렀다. 이렇듯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진 이곳은 별봉을 중심으로 땅위에 하늘세계를 펼쳐 놓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 초기에는 진잠현, 1895년에 진잠군 북면에 속하는 지역으로 넉바위, 무덤마루, 별밭 등의 옛 마을과 달처럼 생긴 달봉 별봉 ..

유성구의 가볼만 한 곳

일곱 개의 기둥으로 서있는 연구원 대덕연구단지의 한복판, 나지막한 매봉산을 바라보고 탁 트인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Korea Research Institute of Standards and Science)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다. 담장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 앞으로 일곱 개의 커다란 조형물로 이루어져있는 의미심장한 정문을 만나니, 이 기둥 형상을 한 조형물들은 국제표준단위계(SI)의 7개 기본 단위를 상징하는데, 각 기둥은 화강암과 벽돌, 금속, 콘크리트, 알루미늄, 나무, 유리 소재로 제작됐으며 소재의 물성에 따라 물질량(mol), 절대온도(K), 시간(s), 질량(㎏), 전류(A), 길이(m), 광도(cd)를 상징한다. 일곱 개의 국제기본단위들은..

신도안과 만인산 태실이야기

만인산의 이성계 태실 자리와 신도안은 어떻게 정하여 졌나? 태조 1년 임신년(1392) *7월 17일(병신)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7월 28일(정미) 태조의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리다. 고조고(高祖考)는 목왕(穆王)이라 하고, 비(妣) 이씨(李氏)는 효비(孝妃)라 하였으며, 증조고(曾祖考)는 익왕(翼王)이라 하고, 비(妣) 박씨(朴氏)는 정비(貞妃)라 하였으며, 조고(祖考)는 도왕(度王)이라 하고, 비(妣) 박씨(朴氏)는 경비(敬妣)라 하였으며, 황고(皇考)는 환왕(桓王)이라 하고, 비(妣) 최씨(崔氏)는 의비(懿妃)라 하다. *8월13일(임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을 내려 한양(漢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게 하다. *8월15일(갑자)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1927년의 유성온천 이모저모

유성온천은 1912년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이 땅을 사들여 개발한 후, 그 이듬해 12월 처음 문을 열었고 1914년에는 (주)대전온천으로 발전 하였다. 당시 자본금은 1만 5천원으로, 100주를 보유한 최대주주인 김갑순이 전무이사를 맡고, 50주를 보유한 이병학(李柄學)과 모리구끼(森菊五郞)가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1923년 남만주철도회사(南滿州鐵道會社)에서 유성온천의 일부를 인수하여 4만5천원을 투자, 부지 내 건물을 신축하고 본격적인 경영에 뛰어 들었다. 이와 함께 호남선 열차시간을 조정하고 당시 유천면(柳川面)에 임시정차장(현 태평동 수침교 부근)을 설치, 자동차를 이용하여 여행객을 유성온천으로 끌여 들였다. 1924년 (주)대전온천에서 (주)유성온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고 경영자이자 실질적..

대전의 역사 이야기

우리 大田은? 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 안에는 백제시대부터 전해오는 이름들이 있다. 우술군(雨述郡), 노사지현(奴斯只縣), 소비포현(所比浦縣), 진현현(辰峴縣) 등이 그것들이다. 우술군은 비풍군(比豊郡)-회덕군(懷德郡)-회덕면(懷德面)-회덕동(懷德洞)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노사지현은 현재의 유성(儒城)으로, 소비포현은 현재의 덕진동(德津洞)으로, 진현현은 현재의 진잠동(眞岑洞)으로 바뀌었다. 1895년(고종32년) 지방관제개정에 따라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행정리명이 생기다. 우리 고장 大田은 舊 韓末, 대전천변 모래밭에 있던 조그만 부락 "한밭"에 경부선 철길 공사를 위해 일본인 기술자와 인부들의 숙소가 들어서고 그후 철도 개통에 맞춰 대전정거장이 생기자 일본 본토에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근대도..

대덕구 송촌동(宋村洞) 이야기

옛날 송촌이란 이름은 지금의 중리동까지 포함되었는데 쌍청당이 있는 마을은 하송촌, 동춘당이 있는 마을은 상송촌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상 송촌리는 만취촌(晩翠村)이라고도 불리었고 동춘당이 있는 곳이다. 하 송촌리는 백달촌(白達村)이었고 쌍청당이 있는 곳이다. 전해오기를 목사공(牧使公 : 遙年)께서 차남 선무공(宣務公 : 汝楫)을 위해 상촌에 집을 짓고 만년에 그 집에서 많이 거처 하시었고, 선무공 자손도 또한 대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덕은가승 상 45p) 선무공에서 승사부군(承仕府君 : 世英)에 이르러서, 서울 회현방(會賢坊)의 집은 장자인 별좌공(別坐公 : 應祥)에게 물려주고, 송촌집을 차자인 임천공(林川公 應瑞)에게 전하여 내려와 현재 필자의 집이 되었..

渾沌의 忠南道廳 / 대전시절의 모습

1914년 박중양 충남도장관 도청 대전이전 총독부에 건의 1925년 도청이전추진대전기성회 발족, 이전반대공주신민회 발족 1930.1.13 충남도청 대전 이전 확정 1932.12.12 본관 상량식 1932.10.1 충남도청 이전 개청식에 모인 군중 1935년의 모습 1959년 하늘에서 본 모습 1960년 3층 증축공사 모습 1968년 새마을운동 (매월 첫 일요일은 대청소의 날) 1960년대 대전역사 옥상에서 바라본 중앙로와 충남도청, 뒤에 보이는 것은 2013년에 철거된 영렬탑 도로 포장중인 중앙로, 저 멀리 충남도청과 우측의 대전소방서 망루가 보인다. 1960대의 중앙로 1980년대 초, 도청 앞을 지나는 현대자동차의 "포니"택시 1995년에 제정 된 충청남도 심볼마크가 본관 2층 벽면(도지사실 테라스)..

대전광역시 법정동 177개의 이름과 유래

No 동명 유 래 대덕구 1 갈전동(葛田洞) 칡밭이 지천으로 덮여 있어 갈밭, 갈대밭이 있어서 갈밭 또는 갈전이라 하였다. 칡갈(葛) 2 대화동(大禾洞) 땅이 매우 좋아 벼가 잘 되므로 대화(大禾)라고 하였다. 벼화(禾) 3 덕암동(德岩洞) 옛날 한 노승이 덕암사(德岩寺)라는 절을 짓고 도를 닦으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승이 죽자 절의 뒤편에 바위가 솟았는데 덕바위라고 하여 사람들이 숭상하였으므로 마을의 이름을 덕바위, 그 음이 와전되어 덤바위 또는 덕암(德岩)이라 하였다. 4 목상동(木上洞) 남해(남개,목포)마을 위쪽에 있으므로 위남해(위목포) 또는 목상(木上)이라고 하였다. 5 문평동(文坪洞) 넓은 들이 있으므로 먼벌 또는 문평(文坪)이라고 하였다. 6 미호동(渼湖洞) 금강(錦江)이 미호동..

2016년 대전시 선정 대전의 명소 40곳

■ 역사명소 9곳 1. 산성의 도시 대전,계족산성 2. 최초의 사회복지기관 미륵원 3. 조선 예학의 요람 동춘당 4. 조선의 정원서재, 송시열의 남간정사 5.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터와 동상 6. 舊 대전형무소의 망루,우물 7. 수운교의 성지 천단 8. 500년 장묘문화 이사동민속마을 9. 옛 충남도청과 근현대사전시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춘당, 남간정사, 옛 충남도청사, 신채호 선생 생가지] ■ 문화명소 11곳 1. 대전역과 추억의 가락국수 2. 호국공원 국립대전현충원 3. 세계 유일의 효테마파크와 족보박물관 4. 현대미술의 거장 고암 이응로 미술관 5. 세계 최대 규모의 전통 종악기 카리용 6. 대한민국 3대 빵집 성심당 7. 화폐박물관 8. 지질박물관 9. 100년 역사 도심속 전통시장 유성..

2015년 사월의 목척교 그리고 대전역의 앞과 뒤

목척교 / 대전땅에 나를 끌어드린 이름 / 못잊을 대전의밤 / 남일해 / 가로등 흐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 신도극장 뒷골목 / DJ가 음악신청을 받던 빙그래 떡볶이집이 있던곳 / 중부권 최대의 건어물시장이 번창하던 곳 한약거리 /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중앙시장이... 명성모텔 왼쪽길이 중동과 정동 경계선 / 정동택사스촌 옛 신탄진길(국도17호선) / 대전로815번길 대한통운 뒷골목 / 역전1길 대전역 서광장 / 대전발 영시 오십분 / 대전부르스 / 대통령선거 유세장 / 귀성표 예매 대전역 대합실 / 귀성 전쟁터 성심당 / 태극당,오복당은 어디로 가고... 대전역 동,서광장 연결육교 대전역 동광장 / 대전역의 뒷동네 / 낙후 되었던 곳 소재동 / 대동천 / 우암생가 / 소재호... 물건너 대전의 렌드마..

대전이 배제 된 호남고속철도 25년史

2015.2.7 디트뉴스24 이충건 편집국장 1993년 8월 25일 정부가 가장 유력한 안으로 내놓은 호남고속철 노선. 천안을 분기로 논산을 거쳐 목포로 이어진다. 교통 공학적으로 서울과 호남을 잇는 가장 빠른 안이었다. 1993년 8월 26일자 “장난치고는 너무 심한 장난이다.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현장이나 한번 가보고 와서 그런 발언을 했으면 좋겠다.” 1993년 8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밝힌 호남고속철도의 조속한 건설 방침에 대한 김원기 전 민주당 의원의 반응입니다. 1993년 8월 26일자 노태우정부 첫 검토… YS ‘즉흥 발언’ 사실 호남고속철은 1990년 노태우정부 때 처음 검토됐습니다. 경부고속철에 막대한 건설비용이 투입되면서 미뤄졌던 것을 YS가 다시 꺼내들었던 겁니다. 당시는..

동춘당(同春堂)의 오해와 진실

동춘당은 회덕의 큰 선비 송준길의 별당이다. 건축물로는 대전의 유일한 보물(제209호)이다. 송준길은 이 별당에서 손님을 맞고,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당시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드나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지난 해 이 별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동춘당은 이제까지 부친(宋爾昌)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1643년 현재의 위치’에 옮긴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는 연보(癸未二月 立祠堂正寢及同春堂)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오류임이 밝혀졌다. 대들보에서 1649년의 상량문(崇禎己丑二月十六日乙巳移刱上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상량문에는 동춘당을 지은 목수의 이름까지 적었다. 이 기록은 송준길이 24세(1629)부터 세상을 떠나던 1672년까지 40여 년 써두었던 일기와..

동구 인동, 중동, 원동 이야기

인동시장 인동의 인동 4거리 서북쪽으로 지금의 대전상가, 인흥상가, 동대전상가라고 부르는 지역에 5일장이 섰었다. 그리고 이 곳을 장터라고 불렀다. 1940년대부터 한참 동안은 농산물의 통제가 심해서 뜸했으나 그 이전부터 상당한 규모의 장터였다. 큰 장날이면 사람들이 넘쳐서 보문교 너머 문창동쪽 대전천변에 줄지어 농촌에서 나온 아낙네들이 농산물을 펼쳐 놓고 거래하기도 했었다. 보문교 부근에는 음식점이 많았고 넓은 광장도 있었다. 이 광장에는 쌀. 보리. 콩 등 농산물과 고추. 마늘 같은 물건이 거래 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록, 순조27년(1827)의 『임원경제지』에 대전장은 2일과 7일에 선다 하였고 철종 10년(1859)의 기록인 호서읍지에도 2일과 7일이 대전장이 선다 하였다. 그러나 일제때의 기록에는..

대전의 으뜸 조망터 24선

1, 보문산 석교동 조망바위 / 식장산과 계족산, 옥천 고리산이 다 보인다. 2, 대전둘레산길 1구간의 오도산 정상 /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분기점 조망이 좋다. 3, 대전둘레산길 2구간 돌탑봉 정상 / 맑은날에는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4, 대전둘레산길 2구간 만인산 정상 /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있는 연하부수형의 명당터를 조망할수 있다. 5. 대전둘레산길 4구간의 식장산 행글라이더장 / 대전시가지 조망이 탁월하며 야경도 아주 좋다. 6, 대전둘레산길 5구간의 능성 정상 / 대전 중앙로와 구 충남도청이 정면으로 보인다. 7, 대전둘레산길 5구간 질현성 3보루 / 대청호 조망이 아주좋다. 8, 동구 주산동 고봉산 전망바위 / 대청호 조망이 뛰어나다. 9, 대전둘레산길 5구간 계족산..

장동 CAMP AEMS 기지촌의 흔적을 찾아서

1980년대 말 내가 그려준 ROSE CLUB 간판을 찾아 보러 1991년까지 CAMP AEMS로 불리던 미군 미사일부대가 주둔하여 기지촌이 형성되었던 현 탄약사령부 정문 앞 마을을 오랜만에 가 보았다. 74번 외곽버스가 지나는 마을안 모습 / 20여년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산디마을과 장동산림욕장을 지나온 용호천에 걸려 있는 양공주가 클럽에서 미군병사와 만나 함께 건너던 개인용 다리 25년 이상된 아주 옛스런 간판들 도로 서쪽의 산비탈에 붙어있는 마당 없는 작은 집들로 통하는 골목길 욕골마을 맨 꼭대기 집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저멀리 장동(長洞)이란 법정동으로 불리게 된 진골(長谷)마을 2013.7.11(목)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욕골마을에서

회덕 뒷골에서 우리들의 옛 모습을 보다

계족산 용화사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林泉물을 보듬어서 德源과 뒷골 빨래터를 지나다가 薺月堂 앞에서 선비정신을 품고 할미, 할애비 돌장승의 배웅을 받으며 '당아래' 마을 앞으로 갑천에 흘러드니 이름하여 법동천이라, 예로부터 '제월당' 송규렴 선생과 그의 아들 '옥오제' 송상기 선생이 오르내리며 "숲속에 숨어 지내는 선비정신"과 "차라리 깨어지드라도 玉을 택하겠다"고 다짐하든 물길이다. 그 물길 위로 개화의 물결을 타고 1904년 경부선 철길이 한줄 놓이며 굴다리가 처음 생겨나고, 다시 1936년 철길이 두줄로 늘어나며 굴다리도 두개가 되드니만 구부러진 철길을 바로 잡느라 네개로 늘어나고, 1978년 호남선 분기점을 대전역에서 회덕 조차장으로 옮기며 복선이 깔리자 굴다리는 또 두개가 늘어나고, 경부고속전철 까..

대전의 명산 100선

대전둘레와 시경계,대청호반을 거닐다 보면 우리 대전이라는 도시가 산속에 묻혀버린 아니 둘러쌓인, 말 그대로 산속의 도시 라는 느낌이 든다 골골마다 조상들의 정신이 살아 있고 봉우리마다 백제의 흥망흔적이 남아있고 물줄기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한밭골에 살고 있음을 보람으로 삶고 한밭골에 살고 있음에 긍지를 느끼며 늙지는 않었지만 쇠퇴한 몸을 이르켜 결코 구차하지않게 산을 쫓아 물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논둑길을 거닐었다 한밭골에서 살아온지 어언 30여년 올랐던 봉우리가 몇개인지 걸었던 길은 몇리나 되며 내딛은 발자욱은 몇개인지 돌이켜 보며 대전의 명산 100개를 추천하니 틈 있을때마다 올라 호연지기를 키웁시다 산이름 높이 위 치 비 고 갈현성 262m 동구 용운동 둘레산길5구간 시기념물12호 갑하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