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둘레산길 산행후기

11월 일요산행 1편 / 이사동에서 오도산 넘어 보문산행복숲길까지

돌까마귀 2023. 11. 21. 13:57

언   제 : 2023년 11월 19일 일요일

어디서 : 대전둘레산길 1구간 보문산길(1/18구간)

누구와 : daum cafe 대전둘레산길잇기의 일요정기안내산행팀(임시안내팀장 달밤)과 함께

 

08:40에 대전역 동광장에서 출발하는 소룡골행 52번 외곽버스가 09:10에 이사동 승강장에 도착하니 

장인어른 산소에 성묘를 간 '한신'님까지 모두 7명의 회원이 나오셨다.

뒤 편에 보이는 오도산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한장 찍으며 '오도산격전지'와 김옥균생가터' 비석을 살펴본다.

고균 김옥균 생가지 비석

신위도근원, 김옥균의 글씨입니다.

아래에 나오는 모든 "명조체" 글은 '2010.2.22 daum cafe 대전둘레산길잇기' 카페에 실린 '가을하늘 김민섭'님의 글입니다.

 

조선중후기 우리나라 인물을 알아보려면 안동김씨 족보를 봐야하고,

조선시대 우리고장 대전의 인물을 알아보려면 은진송씨 족보를 봐야합니다.

  

김옥균은 안동김씨입니다.김옥균의 10대조 할아버지는 선원 김상용입니다.

김상용은 쌍청당 현판을 썼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순사하였습니다.

김상용의 현손녀(4대손녀)가 호연재 김씨로 소대헌 송요화의 부인이 됩니다. 소대헌 송요화의 증조부가 동춘당 송준길입니다.

 

김상용의 동생이 청음 김상헌입니다. 병자호란시 주전파로 최명길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화친하자고 쓴 상소를 찢고 낙향해 자제들 교육을 합니다. 김상헌은 쌍청당 송유의 묘표를 지었습니다. 손자 중에 곡운 김수증은 옥류각, 제월당, 옥오재, 남간정사 현판을 썼습니다. 제월당 송규렴의 처남이 형제가 정승을 지낸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습니다. 김옥균도 글씨를 잘 썼습니다.

김상헌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국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를 지었습니다.

후손 중에 정승, 판서, 참판, 왕비가 줄줄이 나와 금관자가 서말 나온 집안이라는 칭호를 듣습니다. 

 

이러한 안동김씨와 은진송씨는 수백년에 걸쳐 가문이 교류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쌍청당, 옥류각, 제월당, 옥오재 등이 은진송씨 가문의 건물인데 그 현판을 안동김씨들이 쓴 것입니다.

또한 서인계열 중 노론의 핵심이었던 김상헌의 후손 김수흥, 김수항 등이 송시열과 깊은 교분을 맺습니다.

또한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협, 김창흡이 송시열에게 배우고, 소대헌 송요화는 김창흡에게 배웁니다.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당파가 갈리자 사대부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같은 당색끼리 혼인을 하게 됩니다.

노론의 두 핵심인 안동김씨와 은진송씨가 여러대에 걸친 사제, 혈연, 동지 관계로 혼인을 맺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양쪽 가문을 내력을 보면, 생부 김병태가 몰락한 양반이지만 김옥균의 어머니가 은진송씨인 것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김옥균은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과는 11촌이 됩니다. 양쪽 집에서 모두 양자를 가서 보학상으로는 19촌으로 멀어지게 됩니다.

 

충청남도 관광 안내지도를 보면 김옥균 생가터를 공주시 정안면 관정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일곱살 까지 자라다가 한양의 재종숙 김병기에게 양자를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공주에서 살았고, 모친 은진송씨가 이사동이 친정이었기에 김옥균을 이사동에 와서 낳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대전 이사동과 공주 정안에서 각각 생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옥균의 대역죄인으로 죽었기에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천안 감옥에서 목졸려 죽었고, 모친 은진송씨와 누님은 자살, 남동생도 옥사했으며 부인 유씨는 딸과 함께 옥천 관아에서 노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크게 바꿔 놓을 만한 혁신인물로 두 사람을 꼽는데 조선 중종 때 정암 조광조 선생과 고균 김옥균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산하출천(山下出泉)   / 산 아래 샘이 솟네

감한이심(紺寒而深)   /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어

표음기락(瓢飮其樂)   / 표주박으로 떠 마시는 이 기쁨을

수월전심(水月傳心)   / 샘에 비친 달에게로 마음 전하네

한천 왼편에 있다가 지금은 무너져 없어진 '송직각' 가옥 대문채의 2016년 모습과

2018년 모습을 되새겨 보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산내분기점 다리 밑을 지나니

봉강정사를 오르는 돌계단 밑에서 "영귀대" 표석이 반겨준다.

영귀의 출처는 논어 선진편입니다. 이 문장은 논어에서 가장 긴 문장입니다. 

공자께서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에게 질문을 합니다. "만약 너희들의 학덕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자로, 염유, 공서화는 모두 벼슬을 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은 “莫春者(모춘자)에 春服(춘복)이 旣成(기성)이어든 冠者五六人(관자오륙인)과 童子六七人(동자육칠인)으로 浴乎沂(욕호기)하고 風乎舞雩(풍호무우)하여 詠而歸(영이귀)하리이다 /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 지거든 어른 대여섯명과 아이들 육칠명과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올라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무릎이 저절로 쳐지는 명답을 합니다.

증석은 정사보다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남들처럼 세속적인 욕망에 시달리지도 않고 무리가 없으면서 소박한 인간생활 속에서 조촐한 풍류를 즐기겠다고 한 자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봉강정사를 세운 난곡 송병화도 증석 처럼 벼슬욕망을 버리고, 자연에서 소요자적하며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하고자 영귀대라고 지은 것입니다.

광영지 / 원래 조그만 못이었으나 1960년대에 확장을 하며 새운 표석(1986년 월북한 전 외무부장관 최덕신의 글씨)과

봉강정사 울타리 안에 비스듬이 서있는 옛 광영지 표석도 둘러보고 봉강정사 마루에 앉아 기념사진을 한장 찍으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영귀대 현판과 의두헌 현판도 추억 앨범 속에서 꺼내어 본다.

봉강정사(鳳崗精舍) 현판 글씨는 봉강정사(鳳岡精舍)

기계인 일창 유치웅이 90세의 나이인 1990년도에 쓴 글입니다. 일창은 성균관 부원장 등을 역임하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개인전은 한번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가가 90세의 나이에 쓴 글답게 글씨가 물흐르는 듯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합니다. 문헌에는 鳳崗精舍로 나오나 편액은 鳳岡精舍로 썻습니다. 崗과 岡은 서로 통하는 글자입니다. 

영귀대(詠歸臺) 

담당 송우용(澹堂 宋友用)의 글씨입니다. 담당은 은진인으로 충북 영동군 상촌면 출신으로 고창현감을 지낸 계담 송국사의 후손입니다. 어려서부터 서예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평생을 서예공부에 몰두하여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오체에 모두 능했다고 합니다. 계담은 우암 송시열과 친분도 있었고 대전 목상동 갑천변에 송국사가 세운 풍월정이 있었으며 이사동에 묘가 있습니다.

영귀대를 고종 건양 1년인 1896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니, 만약 그 때 현판을 썼다면 담당이 34세 때 쓴 글입니다.

 

참고로 석교동의 봉소루는 신유년인 1921년에 봉소루 십경등 여러 편의 현판을 달았는데, 봉소루, 윤집궐중 현판을 그 때 썼다면 송우용이 59세 때 쓴 글씨가 됩니다. 봉소루 현판의 글씨가 영귀대 현판의 글씨 보다 낫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송우용이 봉소루 현판을 더 늦은 나이에 쓴 것에 합당하기도 합니다.

의두헌(依斗軒)

덕천 성기운이 썼습니다. 성기운은 간재 전우와 면암 최익현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현재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병산사에 배향되습니다. 은진 송씨 집안과 교류가 많았습니다. 

 

봉강정사 뒤편의 돌담 넘어로 공자의 영정을 모신 동로사와 

송병화 선생과 그의 수재자 송병관의 영정을 모시다가 

지금은 송병화 선생의 영정만 걸려있는 '오적당'을 살펴 본다.

봉강정사 뜰의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장인 산소를 다녀 온 한신님 포함 참가자 모두의 사진을 찍고

광영지 옆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니

이름하여 '이사동 유교민속마을 누리길'이다.

물레방아골로도 불렸던 골짜기를 따르다 살짝 왼편으로 내려서면

조그만 바위에 작은 음각문이 있으니 '가을하늘'님의 해석은 아래와 같다.

달밤님과 수기님은 절암천(자라천)물길을 걷고 

나머지는 누리길을 걸어

소화동천 앞 벤치에 닿았으나 눈을 씻고 봐도 바위에 새긴 4글자가 보이지 않아

옛 엘범에서 꺼내보고

물래방아골과 해어져 대전둘레산길 1구간으로 된비알을 올라간다.

한참 동안 숨을 헐떡이며 올라서니 능선에는 바람결이 차갑고

국가숲길 리본을 다는 달밤팀장의 손길은 바쁘다.

사한정에서 막걸리 한잔과 군것질을 나누며

사방을 둘러보니 대전에서 제일 높은 식장산(596.7m)과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은 서대산(905.3m)이 키재기를 하고

금동고개를 향하여 뻗어나간 '대전둘레산길' 1구간 너머에는 2구간의 만인산과 3구간의 정기봉이 키재기 한다.

오도산 정상을 향하는 길에 산내분기점 넘어로 대전둘레산길 4구간 식장산길 마루금도 살펴보고

오도산 정상에 올라서니 길벗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대전시가지 뒤로 저멀리 계족산 마루금과

대전의 보물 '보문산'도 눈앞에 펼쳐 보이고

왼편으로 저멀리 '금남정맥' 산줄기가 아련하다.

광각으로 찍어 본 보문산-계족산-식장산과 대전 시가지는 황홀한 자태를 펼쳐 놓으니

일행들의 탄성은 계속 이어진다.

오도산(吾道山)과 이사동에 얽힌 이규홍선생의 '오하일기"도 꺼내 보고

절고개 방향으로 급경사 목계단을 내려서니

철모르는 나무는 벌써 꽃눈을 틔웠다.

동구 이사동의 은진송씨와 중구 무수동의 안동권씨가 넘나들던 구완고개는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구완터널로 인해 인적이 끊겼고

절고개를 향한 길벗들의 발걸음엔 '이야기꽃'이 피어 난다.

구완동 산허리에 절이 있어 이사동 사람들이 절고개라 부르는 고개를 지나

도토리가 발걸음을 미끌어지게 하는 오르막을 한참 오르니

눈 앞이 확 트이는 조망바위에 앉아 막걸리 잔을 나누며 아까 지나온 이사동 길을 되 짚어 본다.

2000년 초에도 흔들리던 '흔들바위'를 지나

은진송씨와 안동권씨의 신랑 신부가 가마타고 나귀타고 넘던 원앙고개(돌고개)를 지나니 

편안한 낙옆길은 큰 오르 내리막 없이 '보문산 행복숲길'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