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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2.12 후 45년 만에 또 벌어 진 '어처구니' 없는 사태와 그 후

돌까마귀 2024. 12. 12. 15:46

어처구니 상상 밖으로 큰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

또한 바윗돌을 부수는 농기계의 쇠로 된 머리 부분 또는 맷돌을 돌리는 나무막대로 된 손잡이

唐 태종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귀신을 쫓기 위해 병사 모양의 조각물을 지붕 위에 올린 데서 유래한 것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기와장이들이 궁궐을 지을 때 어처구니를 깜박 잊고 올리지 않은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도 하는데 어처구니는 궁궐 지붕에만 세우는 것이라 서민들의 지붕을 올리는 데 익숙한 와장들이 잘 잊고 올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 와장들을 쳐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도성 성문에 는 3개에서 11개까지 올라가는데

그 모양으로는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 등이었다고 한다.

요즘에 많이 쓰는 바뀐 뜻 

너무나 엄청나서 기가 막히다.

영화 속에서 유아인 배우가 한 ‘어이가 없네’라는 말도 많이 쓴다.

 

1979년 12월 12일 12.12 사태 / 군사반란

개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 사건이다. 신군부는 12월 13일 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사후 승인을 받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이에 항거한 5.18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이 됐으며, 1981년 개헌으로 제5공화국이 시작됐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은폐돼 있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야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이를 계기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군 내부개혁을 진행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했으며 이에 따라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됐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신군부)는 이에 불만을 품고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해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전개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군사쿠데타 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했다.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 총으로 위협하며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했다. 이후 저녁 7시 30분경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끌고 나와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해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이 부분에 대해 추후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12·12 군사반란 다음날 아침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으나,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 육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 하에 두었다. 또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했으며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 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와 달리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며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 김복동, 유학성, 유병현, 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며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그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12·12 사태를 일으킨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쿠데타가 끝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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