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이 먼저 문제 삼은 AI 출판
“늑구가 상품화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AI로 그림책을 만들어 파는 건 선 넘었다.”(ID ‘호랑이’)
“‘늑구의 열흘간의 대모험’ 저도 제미나이가 글 써줬어요! 저도 출간할래요!”(ID ‘파천’)
지난달 30일 그림책 ‘늑구의 꿈’이 출간되자 한 온라인 서점엔 이런 후기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동화 속 ‘늑구’는 최근 대전 오월드에서 탈출했다가 돌아온 그 늑대가 맞다. 지난달 17일 생포되고 13일 만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 나오자, 뿔난 독자들은 온라인서점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등에 낮은 별점과 항의 댓글을 달았다.
실제로도 해당 그림책이 이례적으로 빠른 출간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림 제작 과정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에 AI를 이용했다는 걸 별도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도 독자들의 원성을 샀다.
● ‘AI 판독 탐정’ 나선 독자들
출판계 안팎에선 그림책 ‘늑구의 꿈’ 논란을 AI 시대 달라진 독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있다. 최근 AI로 만든 ‘딸깍 출판’이 늘어나자 독자들이 직접 나서 이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책을 고르는 기준’이 바뀌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출간 시점부터 역산해 작업 시간을 추정한 뒤 “사람이 이 시간에 만들 수 있나” “창작자의 노동이 실제 있었나”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더 나아가 책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AI를 어디까지 썼는지 밝혀 달라”며 ‘AI 라벨링’을 요구하기도 한다.
‘늑구의 꿈’을 낸 출판사 측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저자가 글은 직접 쓰고, 그림은 AI의 도움으로 만들었다. 이후 편집부 디자이너가 전체적인 톤에 맞춰 여러 차례 수정했다. 일각에서 지적하듯 ‘딸깍’ 만든 책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저자 OOO 글·그림’으로 표기됐고, 온라인 서점에도 “OOO가 그린 첫 창작동화”라고 소개돼 있다. AI 활용을 명시한 부분은 없다.
일각에선 처음부터 AI 활용 여부와 개입 범위를 공개했더라면 논란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엔 ‘제미나이 글·△△△ 감수’ ‘챗GPT 그림’처럼 AI를 어디에 썼는지 서지정보에 표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도 “서문이나 판권면 또는 인터넷서점 페이지에 AI 활용 여부를 밝혀야 독자의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독자들이 집단 검증을 통해 ‘AI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늘고 있다. 올 3월 미국 대형 출판사 아셰트 북 그룹은 공포소설 ‘샤이 걸’의 미국 출간을 취소하고 영국 유통도 중단했다. 세계 최대 독서 커뮤니티 ‘굿리즈’와 유튜브, 레딧 등에서 독자들이 “AI 흔적이 강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뒤 논란이 커지자 출판사가 내부 검토 끝에 철회를 결정했다. ‘샤이 걸’ 작가 미아 밸러드는 AI 집필 의혹을 부인하면서도 “프리랜서 편집자가 AI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굿리즈’엔 AI 생성물로 의심되는 책들을 공유, 분석하는 리스트와 토론방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있다. 독자들은 AI 특유의 문체나 어색한 표지 이미지, 비정상적으로 빠른 출간 속도 등을 근거로 의심 사례를 정리한다. ‘계속 출간되는 AI 슬롭 책들’ 같은 목록을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독자들이 ‘AI 흔적’을 추적하는 집단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 AI ‘딸깍 출판’ 범람에 위기감 고조
이처럼 독자들이 책의 창작 과정을 검증하기 시작한 건 출판 시장에 생성형 AI를 활용한 저품질 콘텐츠가 무분별하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AI를 활용한 저품질 콘텐츠가 빠르게 늘면서 국가 지식정보 관리 체계에도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따르면 최근 2년간(2024∼2025년) 품질 미달 등의 사유로 납본이 반려된 전자책은 1만1651건에 이른다. 전자책 납본 자체가 급증하면서 관련 보상금 부담도 커졌다. 납본 보상금 지급 규모는 2016년 1212만9270원에서 지난해 2억6276만720원으로 22배 가까이 늘었다.
● 신뢰 회복 위한 출판계의 고민
출판계에선 업계가 선제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AI ‘딸깍 출판’을 걸러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책은 오랫동안 시간과 노력의 산물로 여겨져 온 만큼, AI를 활용해 대량 생산한 콘텐츠가 인간 저자의 고유한 노동처럼 포장될 경우 독자들이 위화감과 배신감을 느낀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이 책은 인간이 직접 만든 책입니다”라고 ‘무(無)AI 인증’을 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마치 유기농이나 수공예 인증처럼 인간 창작 자체를 일종의 ‘프리미엄 가치’로 내세우려는 시도다. 지난달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는 국내 최초로 “출판물에 인간 저작을 보증하는 마크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 마크를 받으려면 저자는 ‘AI가 생성한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AI 활용 사실을 은폐하거나 독자를 오인하게 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담긴 윤리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AI를 사용하되, 활용 내역을 공개하는 방식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AI를 무조건 막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최근 광고나 영상 콘텐츠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했습니다” 같은 안내 문구를 붙이는 사례가 늘고 있고, 이용자들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책 역시 제작 과정의 일부를 공개할 수 있다. 예컨대 “표지 이미지에 생성형 AI 활용” “텍스트 초안 작성에 AI 보조 사용” “인간 저자 최종 집필 및 감수”처럼 AI 개입 범위를 공개하는 방식이다.
<2026.5.11 동아일보 김소민기자의 글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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