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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간 풍습 6월 / 유두(流頭)

돌까마귀 2022. 7. 16. 11:03

음력6월은 계절적으로 가장 무더우며 삼복(三伏)이 들어있는 때이다. 따라서 개장국, 삼계탕같은 자양분이 많은 음식으로 몸을 보하기에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더위에 지쳐 발병하기 쉬운 때이므로 재액(災厄)을 면하고 잡귀를 쫓는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러한 것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이 곧 유두(流頭:음 6월 보름)이다.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하고, 특히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것은 동쪽은 청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믿는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풍속을 통해 불상(不祥)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처럼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 것은 물의 정화력을 인정하여 심신을 물에 담가 더러움을 떨쳐 버리는 세계의 보편적인 습속으로 중국의 상이계욕, 인도의 긍하침욕이 그 좋은 예이며, 종교적 의식에서는 불교의 관정(灌頂), 기독교의 세례(洗禮)가 모두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유두 무렵은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두의 풍속에는 조상과 농신에게 햇과일과 정갈한 음식을 차려 제를 지냄으로써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다. 그러나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된 오늘날, 다양한 생산 양식에 의존함에 따라 그 풍속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있다. 유두풍속도 예외는 아니어서 의례적인 요소는 그 전승이 단절되었으며, 물맞이풍속은 여름 휴가철 바캉스로 대치되었다.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의 약어 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물맞이'라고도 한다.유두의 풍속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수없으나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유두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고려 희종(熙宗)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의하면,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厄)을 떨어버리고 술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유두 에 대한 기록은 중경지(中京志)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고려사(高麗史)권20 명종(明宗) 15년 조에는 "병인(丙寅)6월에 시어사(侍御史) 두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달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연(流頭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경주 풍속에 6월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버린다.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 (流頭宴)이라 한다.조선의 풍속도 신라 이래의 옛 풍속으로 말미암아 유두를 속절로 삼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을 통하여 유두는 최소한 신라시대부터, 또는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풍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풍속편에는 여인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에서는 정릉 계곡, 광주에서는 무등산의 물통폭포,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의 성판봉(城坂峰)폭포 등을 적합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승만의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정릉계곡 외에도 송림과 물이좋은 악박골과 사직단이 있는 황학정(활터)근방과 낙산밑 등이 서울의 물맞이 장소로 좋은곳이라고 하였다. 유두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을 들 수 있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는데, 유두천신이란 이날 아침 각 가정에서 유두면,상화병,연병,수단 ,건단과 벼,콩,조 등 여러가지 곡식을 참외,오이,수박등과 함께 사당에 올리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이때 사당에 올리는 벼,콩,조를 유두벼·유두콩·유두조라고 한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기다란 생선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참외,수박등과 함께 논의 물꼬나 밭 한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그 다음에는 자기 소유의 논,밭 하나하나 마다에 음식물을 묻음으로써 제를 마치게 된다.동국세시기에는 피,기장,벼를 종묘에 천신한다고 하였으며 예기(禮記)월령에는 중하의 달에 농촌에서 기장을 진상하면 천자가 맛을 보고 먼저 종묘에 올리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유두는 조상신이나 농신만을 위한 날은 아니었다.이날 유두천신을 마친 후 일가친지들이 맑은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후 가지고간 햇과일과 여러가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하면 여름철의 질병과 더위를 물리치는 액막이의 기능이 있는것으로 믿었다. 또 문사들은 술과 고기, 음식을 장만하여 녹음짙은 계곡이나 정자에 가서 시가를 읊으며 하루를 즐기기도 하였다. 유두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벼논에 김매기를 할 때이다.아울러 가을보리를 비롯한 팥 ·콩·조 등을 파종하며, 또 오이,호박,감자,참외,수박 등 여름작물을 수확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무렵에 유두라는 속절을 두어 조상과 농신에 대한 감사와 풍년의 기원을 행하고자 한것이 바로 유두의 풍습이라 할수있다. 또한 농사일로 바빴던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닥쳐올 본격적인 더위를 이겨내고자 한 지혜의 결과이기도 하였다.이 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 건단, 수단, 상화병(霜花餠) 등이 있다. 특히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가 먹었다. 햇밀을 절구에 빻아 체에걸러 밀가루를 뽑아 유두면을 빗고 남은 밀기울로 구슬모양으로 만든것을 유두국이라 하는데 5색으로 물들인후 쪄서 말려 3개씩 포개어 색실에 꿰어 허리춤에 차거나 문위에 매달면 재앙을 막는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원래 국수는 긴 까닭에 장수를 뜻해서 경사때는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5색칠을 하는것과 3개라는 숫자는 기수,양수로써 축귀의 효과가 있는 숫자이며 대문위에 걸어두는 것도 잡귀가 드나드는 곳을 차단한 것이다.동국세시기에도 유두국을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서 잡귀를 막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수단과 건단은 쌀가루로 쪄서 길게 빚으며, 가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들어 꿀물에 담그고 얼음 물을 부어서 먹는 것은 수단이고 얼음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이 건단이다. 상화병은 밀가루에 물을 붓고 반죽하여 콩가루와 깨를 섞어서 꿀물에 버무려 쪄서 먹는다.동국세시기 유두조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긴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그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으며, 제사에도 쓰는데 이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또 건단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찬 음식의 종류이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유두(流頭)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우리의 전통명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