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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同春堂)의 오해와 진실

돌까마귀 2022. 7. 31. 12:52

동춘당은 회덕의 큰 선비 송준길의 별당이다. 건축물로는 대전의 유일한 보물(제209호)이다. 송준길은 이 별당에서 손님을 맞고,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당시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드나들던 유서 깊은 곳이다. 지난 해 이 별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동춘당은 이제까지 부친(宋爾昌)이 지은 것을 송준길이 ‘1643년 현재의 위치’에 옮긴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는 연보(癸未二月 立祠堂正寢及同春堂)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복원과정에서 오류임이 밝혀졌다. 대들보에서 1649년의 상량문(崇禎己丑二月十六日乙巳移刱上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상량문에는 동춘당을 지은 목수의 이름까지 적었다. 이 기록은 송준길이 24세(1629)부터 세상을 떠나던 1672년까지 40여 년 써두었던 일기와도 일치한다.

 

동춘당 첫 이름은 ‘청좌당’
동춘당의 처음 이름은 ‘청좌당(淸坐堂)’이었다. 1598년 송이창이 세우고 자신의 호로서 당명을 삼은 것이다. 송준길이 지은 부친의 연보에 “만력 26년(1598) 부군께서 38세 때, 작은 서재를 짓고 편액을 청좌와라 하였다.(戊戌萬曆二十六年 宣祖大王三十一年 府君年三十八歲 搆小齋扁曰淸坐窩)”는 기록이 있다. 송준길이 태어나기도 전에 지은 청좌당이란 이름은,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하던 40대까지 60여 년간 불리었다.

송준길이 청좌당을 옮겨짓고, 당호를 ‘동춘당’으로 고쳤다. 부친 송이창은 1627년에 죽었다. 주인을 잃은 청좌당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심하게 퇴락했다. 이것을 송준길이 44세가 되던 164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은 것이다. 4년 뒤 1653년 포저 조익(趙翼, 1579~1655)에게 자신의 호 ‘동춘’으로 당의 기문을 부탁한다. 同春이란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한다.(蓋取與物同春之義)”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청좌당이, 동춘당으로 바뀌었다.

이 사실이 송준길이 직접 조익에게 부탁한 서간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선인께서 당 한 채를 세웠는데, 병자년 이후로 심하게 퇴락하였습니다. 소생이 본래 있던 곳에서 동쪽 개울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우고, 이름을 同春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만물과 함께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同春文集 上浦渚趙先生 先人構一堂 丙子以後 頹壞殆甚 小生移建於舊基稍東近溪之地 名其堂曰同春 蓋取與物同春之義)”

해체과정에서 1617년 · 1649년 · 1709년 등 세 개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송준길이 12세 때이고, 하나는 44세, 다른 하나는 사후 37년 뒤 증손(宋堯卿)의 것이다. 이 가운데 1649년의 상량문이, 이제까지 알려진 1643년 설이 오류임을 증명해준 것이다. 상량문이 실제의 기록이니 그동안의 기록은 오류였던 셈이다.

 

1617년 창건도 사실과 다를수 있어
당시 일부 매체들이 관계자의 말을 빌어서, 동춘당은 1617년 창건하였다고 확정적으로 보도한바 있다. 그러나 이는 성급한 판단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 이유는 송준길이 생전에 지은 연보의 기록 ‘1598년 청좌와 창건 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송준길이  불과 12세에 별당을 옮겨지었을 리도 없다. 전란 후 대충 지은 청좌당을 이 때 새롭게 중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송이창은 신녕(현, 경북 영천)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계축옥사(1613)를 맞았다. 이 때 서매부(庶妹夫)이던 서양갑이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다. 회덕에 돌아와서 3년 동안 안채를 중수하고, 읍호정(挹灝亭)을 짓고, 숭현서원의 입교당(강당)을 세웠다. 이 때 별당도 중수하지 않았을까? 1598년 지은 것은 전란 후 타다 남은 연목들을 얽어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 송이창의 연보(만력 26/선조 38/1598년)
“작은 서재를 짓고서 淸坐窩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때 대란을 겪은 뒤라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부군이 잿더미를 쓸고 목재를 수습, 몇 칸의 집을 지어서 호군 공(宋應瑞, 송이창의 부친)을 모셨다. 또 작은 서재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낙향인사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자오하였다.(搆小齋 扁曰淸坐窩 時大亂之餘 閭井爲墟 府君掃除灰燼 收拾餘材 縛數椽以奉護軍公 且搆小齋 鑿池種蓮 日與落南人士 觴詠以自娛)”

위의사실로 미루어 동춘당의 처음 이름은 청좌당이었다. 1649년 송준길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자신의 호 동춘을 당명으로 삼았다. 따라서 1643년 창건설과, 최근의 1617년 설은 사실과 다르다. 송준길이 직접 찬술한 부친의 연보와, 상량문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1709년 송준길의 증손이 쓴 8언 36행의 긴 상량문이 있다. 이 상량문은 동춘당의 새로운 진실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당 부분만 발췌(拙譯)하여 전재한다.

恭惟玆堂 遠自先祖 ; 생각건대 이 당은 먼 선조로부터 있었으니
惟淸坐公 盖嘗攸芋 ; 청좌 공(송이창)께서 일찍이 사시던 곳일세.
逮曾王考 寔承其基 ; 증조부(송준길)께서 이 터를 이어받았으니
豈惟承之 又式廓之 ; 어찌 이어받기만 했을까? 규모도 늘리셨네. 
二字新扁 曰惟同春 ; 두 글자 새로운 편액을 동춘이라 이르시니
厥義甚大 小子敢論 ; 그 뜻 심대하여 소자가 감히 논할 손가? 
爰撤舊樑 宛然有記 ; 옛 들보 들어내자 뚜렷한 기록 있으니
己丑仲春 移刱于此 ; 기축(1649) 2월 이곳에 옮겨 세웠다네.

 

<2006.10.18 (수) 중도일보>

<반론 기사>

<2007.2.3(토) 중도일보> 

 

<반론 기사>  

 

2014. 11. 20. 신문기사와 토론자료 이곳 저곳에서 취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