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둘레산길 산행후기

연애바위와 원앙고개 그리고 어청골 이야기

돌까마귀 2022. 11. 7. 22:32

국가숲길로 지정 된 "대전둘레산길" 제1구간 보문산길과 제2구간 만인산길은 대전 중구에 우뚝 솟은 보물, 寶文山 시루봉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를 타고 윗사라니고개(돌고개), 절고개를 지나 吾道山을 넘고, 돌고개(완전고개)를 지나 금동고개에서 1구간이 끝나고, 돌탑봉. 떡갈봉. 안산. 먹티를 지나 萬仞山에서 食藏支脈을 만나  태조 이성계 태실이 있는 태봉재로 이어 진다.

출발점 시루봉에서 알바위봉을 지나 이사동 전망대에 닿으면 발 밑으로 '유교민속마을'로 지정된 이사동이 펼쳐 지고 

산줄기는 이곳에서 동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져 대전 중구와 대전동구의 경계를 이루며 이어지는데

오도산을 가르키는 방향표지를 따라 급경사 계단을 지나서 만나는 이정표가 있는 쉼터에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며 눈앞을 찬찬히 살펴 보아야 보이는 이 바위를 우리 산꾼들은 "연애바위"라 부른다.

10 수년 전 비영리민간단체 "대전둘레산길잇기"의 산행대장을 맡고 있을 때, 장난삼아 '옛날 무수동의 安東 權氏 총각과 이사동의 恩津 宋氏 처녀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하였더니 筆力이 뛰어 난 어느 산꾼이 地方紙 칼럼에 소개하고 급기야  '대전둘레산길 스토리텔링 북'에 까지 실리게 되어 이제는 연애바위라는 이름이 아예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대전둘레산길 제1구간은 보문산을 한바퀴 도는 행복숲길을 가로질러 오도산 방향으로 나가는데

능선을 따라 송전탑 밑을 지나 이정표가 있는 이름없는 봉우리를 넘어

급경사 계단을 내려서면 큰 고개가 나타난다.

성황당 돌무더기가 남아 있는 이 고개를 서쪽의 구완동(舊完洞 임진왜란 때 이곳은 침범을 받지 않아 완전마을이라 불렀으나 남쪽 완전고개 너머 동구 소호동에 새 완전마을이 생겨 구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윗사라니고개'로 부르고, 동쪽의 이사동 사람들은 '돌고개'로 부르며(1994년판 대전지명지), 우리 같은 산꾼들은 이 고개를 "원앙고개"로 부르는데

위의 '연애바위' 이야기 처럼 돌까마귀가 이 고개에 얽힌 이야기라며  MSG를 좀 섞어 "이 고개는 무수동 . 목달동의 安東 權氏 가문과 이사동의 恩津 宋氏 가문이 서로 간에 婚姻을 많이 하여

신랑들은 말이나 나귀를 타고 넘고, 신부들은 바리 바리 혼수품을 싫은 소달구지들과 함께 꽃가마를 타고 넘던 고개라 원앙고개라 부른다"라고 하였더니 산꾼들 사이에서는 이제 정설로 굳어 버렸다. 

허지만 내가 완전 "뻥"을 친건 아니다, 이곳 무수동의 안동 권씨 가문으로 조선왕조 영조 임금 때 호조, 공조판서와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니 이는 아버지 권유(權惟)가 총각시절 우암의 딸과 이 고개에서 만나 300m 위쪽에 있는 연애바위 앞 이 아늑한 곳(아래사진)에서 사랑을 속삭이지 않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냐고 우기며 내 스스로 만족한다.

지금도 넓직하게 남아 있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이름하여 구완동 어청골이라 구 한말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이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마을이다.

완만한 경사의 소달구지가 다니던 길 끝머리에 풍광 좋은 팔각정자가 있는 사방댐이 반겨 주고

멋진 자태의 소나무 3그루가 있는 삼거리에서 바로 나가면 지금도 완전마을로 내려가는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고 길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4호 구완동 청자가마터다.

아래 사진의 한 가운데 나무 숲속에 있는 연못으로 裝人이 고령토 반죽이며 유약을 만들 때 쓰던 用水原池 였으리라.

대전역 동광장행 33번 외곽버스를 타기 위해 가마터에서 삼거리로 되돌아 나가는 길에

녹슨 경운기 1대가 길섶에 방치되어 있는데

어청골 지킴이 村老 內外가 살아 생전에 타고 다니던 그 경운기가 분명하다.

바깥노인이 3년 전에 먼저 떠 났고 안노인이 올 봄에도 들깨 모종을 하고 있었는데

여름부터 안 보여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달래며 2시간 마다 있는 33번 버스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