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둘레산길 산행후기

11월 일요산행 2편 / 행복숲길에서 시루봉 넘어 백골생태공원까지

돌까마귀 2023. 11. 21. 14:14

언   제 : 2023년 11월 19일 일요일

어디서 : 대전둘레산길 1구간 보문산길(1/18구간)

누구와 : daum cafe 대전둘레산길잇기의 일요정기안내산행팀(임시안내팀장 달밤)과 함께

 

잠시 숨을 돌린 뒤 바로 일어나 시루봉을 향하여 오르니

대전둘레산길을 걷는 산꾼들 사이에 '연애바위'로 불리는 멋진 전망터가 반겨주고

한커플 씩 바위에 올라 '폼'을 잡은 뒤

넓직한 바위 밑에서 점심상을 차려 시장끼를 해결한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바로 '이사동전망봉'이라 불리는 멋진 조망터에 닿는다.

산불감시카메라 설치를 위해 지난 수요일에 헬기로 수송한 자재가 쌓여있으나

탁월한 조망은 동,남쪽으로 펼쳐지고

풍광에 취한 일행들은 다시 한번 막걸리와 먹거리로 기력충전을 한다.

시루봉을 향하는 능선길은 편안하고

알바위봉에서 바라보는 '대전시기념물 제10호 보문산성' 너머로 펼쳐지는 대전시가지가 평온하고

저멀리 흐미한 계족산과 살짝 오른쪽 뒤로 보이는 '국가사적 355호 계족산성'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대전시기념물 제8호 질현성' 마루금은 대전둘레산길의 제5구간 길이다.

한참을 풍광에 취하다 길을 나서니

시루봉을 향한 능선길에는 양탄자가 깔려있고

헬기장에 올라서니 '자원봉사 산불감시원'이 반겨준다.

시루봉 보문정을 오르는 길에 만난 여인에게 우리 단체 홍보도 하며

정상에 올라서니 오늘 산행에서 오르막 길은 이제 끝이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까치고개로 내려서니

대전둘레산길 12구간 동물원길의 정규코스는 왼쪽(西)으로 이어지고

우리단체가 편의상 조정한 18-1구간은 한밭도서관 방향으로 나간다.

보문산행복숲길을 가로질러 과례정에 올라 

훌라후프도 돌려보고

사정공원으로 내려서니

휴일을 맞아 주차장은 만차를 이루었고

사정골 식물원을 둘러 본 일행들은

카페 브람스의 카페라떼가 달다.

1978년 국민체육진흥법에 의해 '국민체육관광단지'로 조성되어 요즘엔 '사정근린공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구완동행 33번 외곽버스가 2시간에 한번씩 들리는 이곳 하부주차장에서 끝나고

이제부터 걷는 길은 '백골생태공원'이다.

골짜기에는 석회암이 많아 흐르는 물 색갈이 약간 희게보여 백골로 불리는 이 곳은

일제강점기에 시작하여 1948년에 완공 된 백골저수지 자리로 

1984년 학생운동을 하다 행방불명 된 충남대학생이 자살(?)한곳으로  

밑에 있던 농경지의 도시화로 쓸모가 없어지자 2019년에 조성을 완료한 생태습지공원이다.

사정공원로에 올라서 오-월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대전둘레산길 18-1구간 역방향 걷기를 매조지하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대단하다! 둘도 없다! 화이팅!을 외친 뒤 

나머지 공부를 위해 사정공원로를 따라 백골삼거리로 향한다.

백골삼거리에서 윤휴의 묘를 잠시 바라보고

<대전 중구 사정동 201-4에 있는 백호 윤휴의 묘>

<묘에서 오른쪽 산자락 끝에 있는 백호 윤휴 신도비 / 뒤에는 집안 묘지가 늘어서 있다.>

대둔산로로 나와 산성초등학교 앞에서 각자 귀가길에 오르니 무려 6시간 반 동안의 산행이 모두 끝났다.

백골(白고을) 조선후기 성균관사업, 대사헌, 우찬성 등을 역임한 '백호 윤휴'가 태어나고 자란 곳

 

白湖 尹鑴

조선후기 문신, 성리학자, 유학자로 원시 유학에도 정통하였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송시열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사형당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나 실제적인 갈등은 예송논쟁(禮訟論爭)때부터다.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집권하였으나 5년 뒤인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淸南의 중진이자 논객으로, 西人에 대해 강경파로 꼽히던 인물이다. 또한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을 펼친 인물로 가끔은 같은 남인들이 이건 아니지 않냐며 반대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사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복권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뒤 1694년의 갑술 옥사로 西人이 집권하면서 추탈. 정조 때 다시 복권되었지만 1801년 정조 사후 추탈당했다가 1908년 이완용에 의해 최종 복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