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산산성과 한티순교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팔공산 기슭으로 접어들면 동명저수지가 보인다. 수변공원 현수교 꼭대기에 커다랗게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칠곡군 곳곳에 흔한 도시 브랜드로 대표 상징은 왜관철교다. 경부선 약목역과 왜관역 사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왜관철교는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1950년 8월 유엔군이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작전상 파괴했다 다시 복구하는 곡절을 겪으며 ‘호국의 다리’로 불리고 있다.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다부동전투 역시 칠곡이 ‘호국평화’를 내세우는 이유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과제가 한국전쟁에만 국한될까. 팔공산 자락 가산산성은 또 다른 호국의 상징이다. 주변의 오래된 사찰과 천주교 성지까지 있으니 근원적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땅이기도 하다.
해발 800m 산속에 도호부가 있었다고?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팔공산 서북쪽 산줄기 가산(901.6m)에 삼중으로 쌓은 성이다. 인조 17년(1639) 관찰사 이명웅이 '경상도 60주(州)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성과 구미의 금오산성, 천생산성뿐'이라 판단하고 조정에 건의해 축성이 시작됐다.
이듬해 4월까지 내성을 쌓고 성주에 속했던 팔거현을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한 후 관아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칠곡도호부는 이후 약 180년 동안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했다. 요즘으로 치면 시청이나 도청이 험준한 산중에 있으니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순조 19년(1819) 팔거현 옛터(현 대구시 북구 태전동)로 도호부를 옮기고, 산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지키게 했다.
‘칠곡’이라는 지명도 가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산은 산정이 나직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골짜기도 사방으로 일곱 개가 뻗어 칠곡(七谷)이라 했다고 한다. 현재는 ‘옻 칠(漆)’ 자를 써 칠곡으로 부른다.
가산산성 탐방은 외성 정문에 해당하는 진남문에서 출발한다.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어 차로 쉽게 갈 수 있다. 문루를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보면 이곳이 가산산성의 핵심인가 싶지만 일부분에 불과하다. 가산산성은 정상에 내성과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구조다. 자연 지형을 활용한 부분을 제외하고 인공으로 쌓은 성벽 길이만 11㎞가 넘는다.
진남문에서 내성까지 탐방로는 등산이라 해도 무방하다. 다행히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걷기 때문에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힘든 구간은 없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위아래로 바윗덩어리가 흘러내리듯 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팔공산 암괴군인데 등산객 사이에선 ‘돌강’으로 불린다. 임도 개설로 끊어지지 않았다면 산정에서 흘러내리는 바윗덩어리가 강처럼 보였을 법하다.
그렇게 약 1시간 걸으면 다시 석성이 나타난다. 내성 동문 근처에 수문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산중으로 도호부를 옮길 수 있었던 건 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가산산성에는 6곳에 수문이 있었다. 2014년 발굴 조사를 통해 유량·유속 조절 시설이 확인됐다. 이어지는 성벽에 골격만 남은 동문은 페루의 마추픽추 유적을 연상시킨다.
해발 800m 가까이 올라왔는데 예상과 달리 지형은 더 평탄하고 부드럽다. 동문 안쪽 탐방로로 들어서니 버드나무 우거진 숲 속에 ‘산성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민가가 있던 터다. 험한 산중에 위치한 성 안에 거주하는 대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현재 마을 터는 일정 부분 수목을 정리해 곳곳에 바윗덩어리가 드러나 있고, 담장 흔적도 보인다. 자기와 기와, 숫돌 등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발굴·조사 후 흙으로 덮었다고 한다. 바로 위 넓은 공터는 도호부 관아와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다.
외부와 단절된 산중에 살자니 당시 주민들의 불편이야 말할 수 없었겠지만, 양지바른 구릉에 자리 잡은 마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풍광 좋은 전원주택 단지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우거진 수목 뒤로 팔공산의 우람한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관아 터에서 조금만 오르면 정상 능선이다. 산꼭대기라는 걸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평지가 형성돼 있다. 맞은편 사면에 제법 큰 연못이 보인다. 제방이 일직선인 것으로 보아 인공연못이 분명한데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누가 어떤 용도로 축조했는지 알 길이 없다. 연못 중앙에는 정자를 세웠을 듯한 작은 섬까지 조성해 놓았다. 주변은 키가 큰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한겨울인데도 분위기가 아늑하다. 가산산성 내성에는 모두 4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에서 평탄한 숲길을 조금 걸으면 중성문에 닿는다. 내성을 동서로 분리한 중성에 설치된 문으로 2012년 주변 성벽을 복원했다. 중성문을 지나도 골짜기는 여전히 푸근하다. 수풀이 우거진 이 골짜기에는 보국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매년 2, 3월이면 찬바람 눈 속에서 노랗게 꽃을 피우는 복수초 군락지이기도 하다.
멀지 않은 곳에 가산산성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나다는 가산바위가 있다. 내성 북서쪽 끝 가파른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선 바위인데, 상부는 의외로 넓고 평평하다. 발아래로 옛 칠곡 땅이었던 대구 북구 도심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팔공산을 비롯한 주변 산줄기가 파도치듯 넘실거린다.
생김새가 특이하고 조망까지 뛰어나니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가산의 힘센 장사가 금강산에서 주워온 조약돌을 떨어뜨린 것이라는 전설, 통일신라시대 승려 도선이 땅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바위 굴속에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는 풍수설도 전해진다. 평평한 바위 위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 비바람에 희미해지고 ‘가암(架巖)’이라는 두 글자만 지금도 선명하다.
가산산성에 오른 지난 8일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쾌청하다고 했지만, 하늘엔 오전 내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숲길을 걸을 때만 해도 포근했는데, 가산바위에 올라서니 칼바람이 볼을 때린다. 치솟는 삭풍이 그날만 유별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능선과 나란한 산성 주변 나뭇가지가 모두 성벽 안으로 휘어 있다. 성벽을 따라 중성문으로 되돌아오니 바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숨겨 놓은 민속촌인가, 천주교 한티순교성지
대구 팔공산에 동화사와 파계사가 있다면 칠곡 팔공산의 대표 사찰은 송림사다. 신라 진흥왕 때 중국으로 유학한 승려 명관이 귀국하며 가져온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그 옛날에는 산중이었겠지만 지금은 팔공산으로 가는 도로와 바로 붙어 있다.
산문을 통과하면 오층전탑을 중심으로 대웅전 명부전 삼천불전 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오랜 역사에 비하면 단출하고 소박하다. 대웅전도 새로 지은 듯한데 현판은 숙종의 어필이며, 내부의 향나무 석가여래좌상과 삼천불전의 석조아미타삼존좌상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경내 마당에 우뚝 선 오층전탑 역시 보물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전탑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경북 칠곡 도덕암의 400년 된 모과나무. 수확을 하지 않은 듯 아직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송림사에서 약 2㎞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한 도덕암은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암자다. 400년이 넘었다는 모과나무 가지 너머로 동명저수지를 비롯한 주변 풍광이 소담스럽게 내려다보인다. 인근에 민가나 도로가 없어 처마에 걸린 풍경소리마저 청아하다.
칠곡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한티재 아래에는 천주교 성지가 숨겨져 있다. 조선 후기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촌과 순교지를 아울러 천주교에서는 '한티순교성지'라 부른다. 한티마을에 교인들이 모인 건 1800년대 초 대구 감옥에 갇힌 가족들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860년 경신박해 이후 마을은 더욱 커졌지만 1866년 병인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산자락에는 이 시기 처형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잊히던 한티마을은 1980년대 초 대구대교구가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지 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고 있고, 성모상 뒤로 억새가 하얀 물결을 일으킨다. 억새 산책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자작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숲속에 거짓말처럼 여러 채의 초가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해로 사라진 마을을 재현해 놓은 것인데, 억새로 이은 지붕이며 흙벽에 걸린 멍석 등이 잘 보존된 민속마을이나 촬영세트처럼 보인다. 사찰의 템플스테이처럼 일부는 교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솔(soul)스테이’로 활용되고 있다.
위쪽에는 리조트 시설처럼 커다란 피정의 집이 있고, 넓은 잔디밭 아래 구릉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오후가 되면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억새 군락과 희끄무레한 산 그림자가 흑백의 대조를 이룬다. 교인이 아니어도 평온함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2023. 12. 13 한국일보,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의 글·사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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