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에 맞선 대가는?
12.12 당시 군인의 본분을 지키며 반란군에 맞섰던 핵심 인물들은 이후 오랜 세월 분노와 고통 속에 수모를 견뎌야 했습니다. 군사 반란 이후 달라진 그들의 삶을 "MBC뉴스데스크 팩트체크 <알고보니>"에서 퍼 왔습니다.
12.12 당시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막으려 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
영화 '서울의 봄' 대사 중에서
"너희가 지금 서울로 진입하면 그 즉시 전쟁이야."
결국 강제 전역을 당한 정 전 사령관은 전두환이 아직 대통령이었던 1987년 11월, 기자회견을 자처했습니다.
"12.12는 지휘계통을 무시한 하극상"이었다고 규정하며 진상규명의 전면에 선 겁니다.
1987년 11월 정병두 전 사령관 기자회견
"모든 국민들이 이걸 올바르게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충정이고, 군도 좀 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보자는 충정입니다."
그런데 기자회견 1년도 안 돼 정 전 사령관은 실종됐고, 5개월 뒤 경기도 양주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수사기관은 자살로 결론 내렸지만, 의문사라는 의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89년 3월 6일 뉴스데스크 보도
"정 씨의 사망 시기가 경찰 추정과 부검 의사의 소견이 다른 점 등을 들어서 타살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정병주 전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에 맞서다 총에 맞아 숨진 김오랑 중령.
그 충격으로 시력을 잃은 김 중령의 부인은 1990년 전두환·노태우 등 반란 주범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 준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역시 소송 포기 협박에 시달리다 5개월 뒤 자택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끝까지 반란에 저항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아버지가 화병으로 숨지고, 외아들이 실종됐다 숨진 채 발견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1995년 11월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총칼로 나라를 뒤집어엎어서 국권을 찬탈하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반란 당일 신군부에 납치됐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17계급이나 강등되는 수모와 함께 내란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73세로 숨질 때까지 어떤 공직도 맡지 않은 채 조용히 여생을 보냈습니다.
1995년 11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심지어 나하고 과거에 친했던 예비역 장성들까지도 일일이 감시를 하면서, 그놈들이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해서 은폐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바람에…방대한 그 조직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반면, 나중에 법원에서 유죄를 받은 반란군 핵심 인물 15명은 두 명이 대통령, 5명이 장관, 나머지는 감사원장, 안기부장,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을 나눠 가지며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12.12 군사반란
12.12사태 개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 사건이다. 신군부는 12월 13일 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사후 승인을 받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으며, 1981년 개헌으로 제5공화국이 시작됐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은폐돼 있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야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이를 계기로 계엄사령관에 취임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군 내부개혁을 진행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했으며 이에 따라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됐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신군부)는 이에 불만을 품고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해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전개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 군사쿠데타 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했다.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 총으로 위협하며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했다. 이후 저녁 7시 30분경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끌고 나와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해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이 부분에 대해 추후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12·12 군사반란 다음날 아침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으나,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 육군본부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 하에 두었다. 또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했으며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 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와 달리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며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 김복동, 유학성, 유병현, 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며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은 그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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