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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이야기

돌까마귀 2024. 2. 4. 12:18

남녀 뒤섞여 밤새 먹고 마시고 놀았다…오늘만 통행금지 해제요

풍요롭고 떠들썩했던 18세기 서울의 설날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이들. [국립민속박물관(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집집마다 향기로운 술 넘쳐나고(家家椒酒酒千壺), 쇠고기 구이, 양고기 찜, 폭죽 모두 준비됐지(牛炙羊烹爆竹俱). 반백 노인은 차례술 고통스레 들이키고(老者斑白耐屠蘇), 소년은 의기양양 장군, 멍군 외치네(少年意氣覓呼盧).”

 

숙종때 학자 김창흡(1653~1722)의 문집인 <삼연집>에 수록된 ‘설날한탄(新歲歎)’이란 시의 일부다. 김창흡의 글에서 묘사된 18세기 전후 한양의 설날풍경은 조선이 가난하고 낙후됐다는 통념을 허문다. 그가 살던 시절의 설날은 풍요롭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남여 길 위에서 만나 서로 새해인사를 건네니(都人士女途中賀), 이날 만은 모두 즐거운 표정들(是日顔色兩敷腴). ··· 금천교에서는 기방의 가야금 연주소리(靑樓鼓瑟錦川橋), 종각네거리는 붉은 머리띠의 소년들 공차기놀이(朱帕蹋鞠鐘樓衢).”

 

김창흡은 그러면서 “문을 나서면 바깥놀이가 사흘동안 계속되니(出門行遊三日畢), ··· 가련타, 송구영신의 즐거움이여(可憐送舊迎新樂)”라고 했다. 사흘간이나 요란하게 놀러다니려니 심신이 괴로울 수 밖에.

음력 1월은 농업을 근간으로 했던 한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달이었다. 한해는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이어진다. 마땅히 1월 1일은 봄이 돼야 하지만, 사실 양력 설은 1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이다. 음력 1월 1일에 와서야 비로소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은 동시에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우리 조상들은 음력설을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로 인식하고 기념했다. 옛사람들은 뜻깊은 1월을 어떻게 축하했을까.

 

설날은 사흘간 연휴, 모든 관청·시장 휴무하고 금지하던 소도살도 허용

김수철 필 경성도(1868년). 북악산에서 삼각산, 도봉산까지 이어지는 연봉을 배경으로 한양도성 내 시가가 한눈에 펼쳐진다. 박제가(1750~1805)는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서 “도성 4만호의 모습이 물고기 비늘 같다”고 했다. 화가는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수만호의 밀집한 가옥들을 촘촘히 묘사해 평화로운 도시경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청이 밀집했던 육조거리(일제강점기). 조선시대에는 음력 1월 1일부터 사흘간 모든 관청과 관허시장이 문을 닫았다.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설날은 사흘간 연휴였다. 조선후기 학자 김매순(1776∼1840)이 서울의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설날부터 3일간은 모든 관청이 휴무에 들어가고 시전(市廛·관허시장)도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감옥도 죄수를 내보내고 비웠다. 소를 잡지 못하게 하는 우금(牛禁)도 이 기간 풀렸다. <열양세기기>는 “단속 관리들이 우금패를 깊이 보관하고 사용하지 않아 민간에서는 소를 자유롭게 잡아 팔았다. 큰 고깃덩이를 시내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대궐에서는 아침 일찍, 삼정승이 모든 관원을 이끌고 정전 앞뜰에 나아가 임금에게 새해 문안을 드린다.

이를 정조하례(正朝賀禮·신년축하인사)라 했다. 정조하례는 일찍이 삼국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는 “신라 진덕왕 5년(651) 봄 정월 초하루,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에 하례하는 예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조선건국 후 첫 정조하례는 1393년(태조 2) 열렸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는 중앙과 외관의 인사를 받았다. 각 도에서 토산품을 바쳤고 알도리(斡都里·건주여진)는 살아있는 호랑이를 진상했다. 좌시중(좌의정) 조준이 술잔을 받들어 “큰 경사를 감내하지 못하여 삼가 천세수(千歲壽)를 올린다”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천세”를 세번 외쳤다.

단원풍속도 中 논갈이. 음력 1월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인 동시에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농업은 국부의 원천이었다. 조선 왕들은 새해 첫날 지방관들에게 “백성들의 농사에 각별히 신경쓰라”는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22대 정조(1752~1800·재위 1776~1800)는 재위기간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설날 윤음을 팔도관찰사와 유수들에게 하달했다. 양란으로 피폐해진 농업이 정조대 와서 많이 회복됐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지방관들은 왕명에 단 한 차례도 응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정조는 1799년(정조 23) “책자를 작성해 (지시사항을) 조목조목 보고하라”고 엄명했다. 권농윤음은 그러나 정조 사후 더 이상 관례화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농업은 국부 원천···임금들, 새해 첫날 지방관에 “농업생산성 높여라” 특명

설날 나들이. [국립민속박물관(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민간에서도 집안에 마련된 사당에 나아가 새해가 됐음을 고하고 제사를 지낸다. 이어, 집안 어른과 직장 상사를 찾아뵙고 새배를 했다.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은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떠들썩하게 왕래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은 새옷으로 한껏 단장했다. <열양세시기>는 “이를 세장(歲粧) 또는 설비음(歲庇陰·설빔)이라고 한다”고 했다. 새해에 모든 것이 새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열양세시기>는 또 방문객이 붐비는 정승·판서 등 권세가들은 손님들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고 세함(歲銜·명함)만 받았다고 전한다. 붓과 종이를 별도로 구비해 명함 없는 손님이 이름이라도 남기게 했다.
 

찾아온 손님에게는 세찬(歲饌)과 세주(歲酒·차례주)를 대접했다. 설날하면 떡국이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멥쌀가루를 쪄 나무판 위에 놓고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늘려 만든 떡이 백병(白餠·가래떡)이다. 이를 엽전 두께만큼 얇게 썰어 장국에 넗고 끓인 다음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쳐서 조리한 것을 병탕(餠湯·떡국)이라 한다. ··· 시장에서 시절음식으로 판다. 떡국 몇그릇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곧 나이가 몇살인가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과 거의 동일하다. 떡국문화가 여러 세월동안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갖가지 한약주로 빚은 세주는 “악한 기운을 잡는다”고 뜻으로 도소주(屠蘇酒)라 불렸다. 세주는 어린아이부터 마셔야했다. 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1516~1599)의 수필집 <견한잡록>은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은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신다”고 했다. 나이가 적을수록 전염병에 취약해 먼저 나쁜 기운을 떨쳐 버리라는 어른들의 배려다.

떠들썩한 옛거리 풍경(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외출 힘들었던 양반가 여성들, 화려하게 꾸민 ‘문안비’ 보내 인사교환

신윤복 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아무리 설날이라지만 양반가 부인들은 여전히 바깥출입이 불편했다. 이들은 정초 연휴가 끝나는 3일부터 대보름인 15일 사이 화려하게 치장한 어린 여자종을 일가친척에게 보내 새해인사를 교환했다. 문안을 대신하는 여종을 ‘문안비(問安婢)’라고 했다. 대궐은 갇힌 공간이다보니 문안비의 왕래가 잦았고 이를 둘러싼 잡음도 많았다. 내시가 문안비를 희롱했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1493년(성종 24) 5월 25일 <성종실록>은 “(왕이) 의금부에 전교해 ‘내관 이양이 계성군 집의 문안비에게 농을 걸었으니 장형 70대에 처하라’ 하였다”고 했다. 기묘사화(1519년 훈구파가 조광조를 숙청한 사건) 때 ‘조씨전국(趙氏專國·조씨가 나라를 농단한다)’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신진사림을 몰아낸 장본인도 경빈 박씨의 문안비였다.
널뛰기(일제강점기). 집안에 갇혔던 조선 여성들은 널뛰기를 통해 바깥 구경을 했다. 널뛰기를 잘 하면 아이를 힘들이지 않고 잘 낳는다는 속설이 퍼져 1m이상씩 높이 뛰었다. [부산시립박물관]
널뛰기(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집안에 갇힌 여성들은 설날에 널뛰기 놀이를 통해 담장 밖의 세상을 훔쳐봤다. 널을 잘 뛰면 시집가서 아기를 순풍순풍 낳는다는 말이 떠돌아 높이뛰기 경연도 벌어졌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는 “여염집 부녀자들이 몇 자 높이로 올라가며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고 했고, 순조때 이낙하가 지은 ‘답판사(踏板詞·널뛰기노래)’는 “높이 솟을 때는 3척(尺·1척=30㎝ 정도)에 이르네”라고 했다.

 

더위팔이도 설날 풍속이었다. 심수경의 <견한잡록>은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한다. 자기의 병을 팔고 재앙을 면하고자 함이다”라고 했다.

정월 세시행사는 대보름날에 정점을 이룬다. 달의 움직임이 기준인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첫보름달은 1년 뜨는 달 중 가장 중요했다. 현대인들은 1월 1일에 모두들 산이나 바닷가로 몰려가 해맞이를 하지만, 과거에는 대신 대보름 달맞이를 하며 한해의 소원을 빌었다. <동국세시기>는 “(대보름)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달맞이라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吉)하다”고 했다. 달이 뜰 때 동정을 떼어내 불에 태우면 액을 막는다고 믿었다.

 

대보름날 서울 종로에서 밤새 다리밟기···각종 사고 끊이지 않아 금지령도

다리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조선 풍속화. 신명난 놀이판이 한창인 가운데 남자들이 다리를 건너가는 젊은 여성을 쳐다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범수 작 다리밟기(광복이후). [국립민속박물관]
대보름 밤에는 다리밟기(踏橋·답교)를 하며 밤새도록 노는 야회(夜會)가 펼쳐진다. <동국세시기>는 “서울 장안의 주민들이 신분이나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몰려나와 열운가(閱雲街·보신각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거리)에서 저녁 종소리를 들은 뒤 여러 곳의 다리를 찾아 다닌다.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脚)에 병이 나지 않는다고 하며 대광통교·소광통교 및 수표교에 가장 많이 모인다”라며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이 퉁소를 불고 북을 쳐대며 일대가 굉장히 소란하였다”고 했다.

 

나라에서도 이날만은 특별히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정조실록> 1791년(정조 15) 1월 13일 기록도 “사흘간 야금을 풀고 숭례문과 흥인문을 열어 도성의 백성들이 답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사고도 생기게 마련.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은 “남녀가 길거리를 메워 밤새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법관이 이를 불허하고 체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여성의 북문외유(北門外遊)도 허용됐다. 도성의 북문(숙정문)은 다른 문에 비해 외지고 음기가 강한 북향이어서 평소에는 폐쇄돼 통행이 금지됐다. 이로인해 “숙정문 밖에 뽕밭이 많다”, “못난 사내가 북문에서 호강받는다” 등 다양한 속설이 퍼졌다. 여성들이 대보름날 북문을 세번 왕래하면 그 해 모든 액운이 없어지고 일년 내내 몸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했다.

한양도성의 북문인 숙정문은 과거 인적이 드물고 북쪽이라 음기도 강해 평소 문을 폐쇄하고 통행을 금지했다. 하지만 대보름에 한해 하루만 문을 열어 여자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배한철 기자]

 

석전(石戰·돌팔매놀이 또는 편싸움)도 대보름 때 행해졌다.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도망가는 편이 생기면 승부가 갈린다. 돌팔매를 통해 우환을 떨치고 한해의 안녕과 풍년, 무병을 기원했다. <동국세시기>는 서울에서 벌어진 석전을 소개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삼문(남대문·서대문·서소문) 밖 주민들과 아현 주민들이 떼를 이뤄 편싸움을 했다. 만리재(서울 서부역에서 마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위에서 고함을 지르고 돌을 던지다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기도 했다. 삼문 밖이 이기면 경기에 풍년이, 아현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동국세기기>는 “바야흐로 싸움이 심해져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상처가 나고 죽기도 해 나라에서 특별히 금지시키지만 고질적인 악습은 고쳐지지 않는다”며 “성안의 아이들도 본받아 종각거리나 비파정(琵琶亭·종로 관수동에 있던 정자)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다”고 했다.
 

전통은 세월 흐르며 변하겠지만 설레는 정취만은 늘 한결 같기를···

구한말에 이르면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 속에 설날의 활기 넘치던 설 분위기도 침체되고 퇴색된다. 왕실·관청 도자기 납품 공인(貢人) 지규식이 1900년 전후로 쓴 <하재일기>에서 언급되는 설날은 이전 세대와 많이 다르다. 지규식은 설날 아침에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평소처럼 일터로 출근을 했다. “차례를 마치고 곧바로 관성제군(관우)을 배알하였다. ··· 공방(직장)에 도착하니 자리에 시축(시를 적은 두루마리) 하나가 보였다. 바로 유 초사의 설날 시였다. 곧바로 차운하여 가볍게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전통도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설날의 기분 설레는 정취만은 늘 한결 같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1.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김매순

2. 경도잡지(京都雜志). 유득공

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홍석모

4.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삼연집(김창흡), 견한잡록(심수경), 지봉유설(이수광), 하재일기(지규식)

5. 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편. 국립민속박물관. 2004

6. 한국의 세시풍속. 최상수. 고려서적. 1960

 

<2024.2.4 매일경제 배한철 기자의 글 퍼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