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와 추억여행

'장보고'가 터를 닦고, '정약전'이 기름 친 흑산도 이야기

돌까마귀 2021. 5. 11. 10:07

 

흑산도 열두굽이길. 장보고의 얼이 서린 상라산 전망대 인근 흑산도아가씨 노래비는 사진에서 맨 아래 있다.

 

목포항에서 서쪽 뱃길로 2시간쯤 가면 만나는 바다색과 큰 섬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손암 정약전(1758~1816)이 쓴 ‘자산어보’의 흑산도에 임박한 것이다.

 

사진명소가 된 ‘조선의 알카트라즈’

‘조선의 알카트라즈’ 중죄인 유배지 옥섬은 이제 놀러온 청춘의 사진명소가 됐다.

흑산면 예리에 있는 흑산항을 몇 백m 앞둔 지점 빨간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이 보인다. 선장이 옥섬이라고 하길래 ‘과연 구슬 옥자 답네’ 했지만, 감옥 옥(獄)자를 쓰는 ‘조선의 알카트라즈’는 반전의 설명이 돌아온다. 흑산도가 유배의 섬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당국의 시선을 기준으로 ‘위험한 인물’을 가둔 곳이지만, 지금은 예쁜 사진명소가 됐다.

여객터미널에 도착해 고래공원 쪽으로 가면 흑산도 아가씨 동상이 반긴다. 순박한 미소가 돋보인다. 물질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강물 위를 노 젓던 춘천 소양강 처녀보다 온화하게 만들었다.

육로여행은 27년만에 544억원 들여 완공된 일주도로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돈다. 고래공원 뒷산 흑산도(20㎢) 공항 입지론이 토론을 거듭하는 가운데, 부산 신공항 부지인 가덕도(21㎢) 면적과 흑산 본섬 면적은 비슷하지만, 주변 장도 등 군도를 합하면 49㎢로 백령도(51㎢)와 엇비슷하다.

 

장보고가 터 닦고, 정약전이 기름친 곳

정약전의 인문학, 실천하는 실학의 터전, 흑산도 유배문화공원

흑산관광협동조합을 이끄는 장순열씨는 “초기 입도는 군인, 상인, 당나라 유학생, 승려 등 해상왕 장보고 장군의 선단에 의해 이뤄졌고, 그때 쌓은 산꼭대기 반달모양의 상라산성과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가 첫 정착지 진리 읍동마을을 감싸고 있다”면서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 사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민과 잘 화합하면서 지혜롭고 인문학이 빛나는 마을이 됐다”고 소개했다.

버스는 ‘자산어보’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된 여객터미널 앞의 '자산문화원'에서 출발해-진리 고인돌-전교생 19명에 교직원 10명인 흑산중학교-국립공원연구원 철새연구센터-‘전설의 고향’ 소재가 됐던 당숲과 초령목-배낭기미 해수욕장-장보고의 얼이 밴 무심사지 석탑과 석등을 지나 흑산도 대표 명물, 열두굽이길을 오른다. 이런 굽이길이 전국에 10곳 남짓 있는데, 단언컨데 최고인듯 싶다.

신라후기 철제마, 주름무늬병, 청자류, 흑유자류 등이 출토된 상라산은 꽤 오래 머물러도 되겠다. 전망대도 좋지만 조금 더 오르면 동,서,북 풍광을 다 보고, 용이 승천하는 듯한 열두굽이길을 한눈에 본다.

한반도 지도바위

마리재를 지나면 해안가에서 만나는 한반도 지도 바위의 작명 방식은 홍도의 코카콜라병 바위와 같은 맥락이라 특이하다. 바위 한복판에 뚫린 구멍 모양이 한반도처럼 생겼다.

 

벼랑위 기둥없는 하늘다리, 놀라운 볼거리

하늘도로

이어 교각없는 다리가 바다를 향해 쭉 뻗어나온 400m 길이의 하늘도로를 만난다. 친환경 첨단 켄틸레버 공법으로 만든 기술적, 시각예술적, 환경적 건설예술이다. 장가계의 절벽 잔도는 죄수들을 동원해 그들의 희생을 딛고 사람이 겨우 걸을 정도로 좁게 만들었기에 이해가 가는데, 이 다리는 큰 차가 교차하는 넓은 도로라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웬만한 관광지 못지 않은 볼 거리이다.

일주 버스는 창망한 바다와 동행하면서-문암산 약수터-흑산도 아가씨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흑산도일주도로준공 기념비 여신상-심리-한다령을 지난다.

드디어 흑산면 사리 정약전 사촌서당과 유배문화공원. 골목길에서 옛돌담을 만난다. 작은 성(城)을 연상케 하듯, 세찬 바람을 견디려 체성(體城)에 비유할만한 아래 쪽은 굵은 바위로 아귀를 맞추고 위로 갈수록 잔 돌로 촘촘하게 쌓았다.

 

정약전-장창대, 계급장 뗀 우정

배위에서 책 보는 장창대와 미소짓는 정약전 / 영화 자산어보에서

유배문화공원은 사촌서당과 자산어보의 어류 조각 자산어보원, 야생화 화원, 유배자의 위리안치(가시로 울타리를 쳐 연금), 절도안치(거주지 주변 이동 가능, 상봉 허용), 본향안치(고향 마을에만 머무르게 함)를 체험해 보는 공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손암 선생과 주민들의 찰떡화합은 흑산에서 위대한 자산을 만들었다. 물론 검을 현자 두 개를 붙인 자산(玆山) 역시 ‘검다’는 뜻이지만 흑(黑)자 보다는 우아해 보인다. 아울러 풍요로운 자산(資産)이라는 느낌도 준다.

이곳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한 정약전은 동생(약용)의 둘째아들(학유) 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청년 장창대(1792~?) 등과 고기잡이와 해양자원 탐방을 마치면, 초기엔 사촌서당, 말기엔 우이도 서당에서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수산물 연구는 당시로선 양반이 할 일이 아니었지만, 실천하는 실학자 다웠다.

장창대는 배 위에선 손암의 친구였지만, 서당에선 깎듯한 제자였다.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유배 온 낮선 이방인과 섬사람들의 계급장 뗀 만남, 갈등, 교류 속에서 인정은 더욱 두툼해졌을 것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장창대 역을 맡은 변요한이 대본을 읽은 뒤 촬영 답사를 왔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 심정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공도정책 속 ‘자산어보’는 어부들의 빛

유배공원을 지나면 만나는 칠형제바위 마을

‘체험, 삶의 현장’ 방식으로 기술된 자산어보(1814년)는 해양생물을 종류별로 분류해 이름, 모양, 습성, 맛, 건강 효능, 민속, 고기잡이 도구까지 정리했다.

어부들이 다 아는 내용일 것 같지만 자산어보가 이들에게 빛과 같은 교과서가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조선은 공도(空島:섬 비우기)·해금(海禁:해양활동 금지) 정책을 시행, 섬을 기반으로한 어로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섬을 등한시하는 정책과 관리비용문제로 우리땅이던 대마도는 왜구의 전진기지로 전락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흑산도 절경

공도정책으로 섬은 유배지가 된다. 흑산도에만 102명이 유배왔다. 시기는 다르지만, 면암 최익현, 좌의정 김재로, 이조판서 이담, 부제학 홍계적, 승지 이익운, 영원군수 정세주, 옥구현감 정택부 등이 흑산도에 유배왔고, 탄핵된 상궁나인, 남편과 생이별한 멸문(滅門)의 부인들이 쫓겨오기도 했다.

영화 ‘자산어보’가 조용하지만 지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카카오갤러리를 통해 ‘정약전과 자산어보, 그리고 흑산도’라는 제목의 온라인 전시를 공개하고 있다.

유배공원을 지나자 마자 칠형제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치고 낚시배가 떠있는 마을을 만나는데 흑산도의 사진맛집이다.

 

홍어도, 전복도 태평양 최고

흑산도 아침 전복죽 한상

흑산도 인문학의 진신사리 같은 마을 사리를 지나면 산 중턱에서 노인 닮은 바위가 내려다 본다. 흑산도 사람들은 제주 출신 돌하르방이라고 했다. 이어 일주 관광버스는 샛개 해변, 면암 최익현선생유허비, 가는개 해변를 거쳐, 읍내 한복판에 돌아온다.

흑산도의 새벽. 아직 개시를 하지 않았는데, 상점은 잠금장치 없이 어제 저녁 퇴근할 때 모습 그대로다.

국제 바코드가 붙은 흑산도 홍어의 품질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이곳 전복도 동양 최고 수준이다. 자연산을 물론이고 양식도 물살 센 곳에서 길러져 전혀 비리지 않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전복죽 한상이 차려진다. 식당 가는 길, 장사를 시작하지 않은 숱한 수산물 노점이 어떤 잠금 장치 없이 전날 저녁 물건 팔던 모습 그대로다. 몸만 퇴근했던 것이다. 주민끼리는 물론 이방인도 믿는 심성이 드러난다.

 

홍도 뺨 치는 해안절경과 세계적인 장도습지

쌍용동굴

해변에는 쌍용동굴 등이 멋진 부속섬 다물도 일대가 홍보 못지 않게 멋지다. 또 낙타바위, 원숭이바위, 촛대바위(올림픽 성화를 닮은), 칠성동굴, 풍년학바위, 고래바위, 동쪽 영산도의 석주대문, 공룡바위섬 등 비경이 즐비한데, “흑산아 우지마라, 홍도 아우 못지 않다”는 촌평이 절로 나온다. 이들은 하루 세 번 운항되는 유람선으로 관람한다.

서쪽에서 본섬을 마주하는 대(大)장도는 세계적인 연구대상이다. 섬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산습지(해발235m)로 국내 세 번째 람사르습지로 지정돼 있다. 이탄층(泥炭層: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의해 죽은 식물이 썩지 않고 쌓인 곳)이 발달돼 있고, 멸종위기종인 매와 수달, 천연기념물 새매와 흑비둘기, 제주도룡뇽, 플라나리아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가도 가도 뱃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가거도는 과거 소흑산도로 불렸다. 섬등반도의 빨간 우체통

앞으로 본섬과 케이블카로 이어질 장도와 영산홍이 아름다운 꽃섬 영산도는 코 앞에 있고, 과거 ‘소흑산도’, ‘가도 가도 뱃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섬’으로 불리던 흑산면 남서쪽 끝 가거도와 서쪽 끝 홍도는 큰형 흑산도가 있어 외롭지 않다. 흑산-홍도, 흑산-가거도, 흑산-홍도-가거도 여행 코스가 늘 붙어 다닌다.

 

헤럴드경제 2021.5.11 함영훈 기자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