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통계조사에 따르면 연로하신 부모를 집에서 모시지 않는 것이 불효라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2명에 불과했다. 과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며 효를 주요 덕목으로 여겼던 선조들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중국의『효경(孝經)』에는 늘 부모의 마음을 살피고, 공경하며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을 효도의 으뜸으로 삼았다. 선조들 또한 효를 실천하는 일상은 물론이거니와 시와 글로써 효심을 담기도 했다.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정원에 녹아들기도 했는데, 우리 대전에도 무수동에 효심 지극한 선비가 그 마음을 담아 만든 정원이 전해진다. 바로 유회당 원림(園林 / 집터에 딸린 수풀)이다.
조선후기 문신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은 명대 문인의 시(詩) 중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품고자 한다.’는 대목에서 유회당이라는 이름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우암 송시열에게 수학하고 일찍이 요직을 거치며 강직한 성격과 깊은 애민정신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효심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선묘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유회당을 짓고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늘 선친의 가까이에 있으려 했다. 1727년부터 삼년간 호조판서를 지내는 동안 선묘를 찾아뵙지 못한 간절함에 무수동 일대를 화폭으로 담아 소중히 간직하기도 했다는 일화에서도 그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를 지나 산 중턱에 오르면 무수동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유회당이 있다. 이곳 충효문을 통해 유회당에 들어서면 네모난 연못과 아기자기한 돌다리를 건너 화계 위에 앉아있는 유회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회당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앞으로는 너른 들판과 정원 안의 연못이, 뒤로는 삼근정사와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삼근정사 협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안동 권씨의 묘역에 다다르게 되고 산중턱 사이로 난 길을 따라 1㎞정도 오르면 야트막한 산자락이 거업재와 여경암을 품고 있다. 여경암과 거업재는 권이진이 후손들의 강학처로 활용한 곳이다. 여기까지가 유희당 원림의 영역이다. 선묘를 두고 아래에는 유희당을 지어 선조들을 받들고, 위로는 여경암과 거업재에서 선조들의 대를 이어 가문의 발전을 염원한 셈이다.
권이진은 일생동안 선친에 대한 효심과 가문의 안녕을 기원했고, 고향을 떠나서도 늘 유회당을 그리워했다. 그의 후손들 또한 선현의 뜻을 이어받아 이곳을 소중히 여겼던 지극한 효심 덕분에 오늘날까지 유회당 원림이 전해 올 수 있었다.
오래전 강직하게 살다간 효심 가득한 선비의 자취를 마주해보며 바쁜 생활에 지쳐 미뤄두었던 소중한 덕목들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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