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곡(龍山九曲)
1곡:심룡문(尋龍門)
2곡:은룡담(隱龍潭)
3곡:와룡강(臥龍岡)
4곡:유룡대(游龍坮)
5곡:황룡암(黃龍岩)
6곡:견룡소(見龍沼)
7곡:운룡택(雲龍澤)
8곡:비룡추(飛龍湫)
9곡:신룡연(神龍淵)
취음 권중면(翠陰 權重冕) 1856~1936
구한말의 학자로 한양에서 태어나 조정에서 여러 내직을 거쳐 외직으로 황해도 평산군수로 나갔다가 능주군수로 있을 때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 관직을 버린후 비통에 젖어 은거해 있다가 1916년 회갑되던 해 봄에 계룡산자락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로 들어오셨다,
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채에 서당을 차리고 망국의 서러움 속에서 두문불출로 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켰으며 국운이 되살아 나길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시다 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81세되던 1936년에 돌아가신 비운과 절의의 선비이시다.
시집 52권, 문집 14권,기행문 1권등 모두 67권의 집필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이 선생의 집을 3개월간 점거 사용하며 휴지와 불쏘시개로 사용하여 모두 없어지고 기행문인 "금강산유람기" 한권만 전할뿐 66권은 망실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에 사시면서 임신년(壬申年,1932) 8월 "용과 함께 신이 숨을 쉬는 곳"이라는 의미를 붙여 상신리계곡에 9곡을 선정하여 직접 글씨를 쓰시고 바위에 새기셨으니 금잔디고개 넘어 갑사계곡에 매국노 윤덕영이 개인의 별장용 갑사구곡을 새긴지 5년뒤의 일로 잠들었든 용이 깨어나 승천하듯이 우리나라의 광복과 비상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용산구곡이다.
그의 아들은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인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인데 이미 돌아 가셨고 선생의 며느리가 이곳에 살면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단의 명맥을 이어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으나 요즈음 근황을 알길이 없고 선생의 제자이자 권태훈의 친구인 만취 최종은(晩翠 崔鍾恩1915~2002)선생의 막네아들 내외와 봉우사상연구소의 정재승님이 상신리에 살면서 그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갑사구곡(甲寺九曲)
1곡:용유소(龍游沼)
2곡:이일천(二一川)
3곡:백룡강(白龍岡)
4곡:달문택(達門澤)
5곡:금계암(金鷄암)
6곡:명월담(明月潭)
7곡:계명암(鷄鳴암)
8곡:용문폭(龍門瀑)
9곡:수정봉(水晶峯)
간옹 윤덕영(艮翁 尹德榮) 1873~1940
본관:해평(海平). 아버지:영돈녕부사 철구(徹求), 동생 택영(澤榮):순종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아버지.1894년 식년 문과급제,1895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에 다녀옴.1901년 경기도관찰사 겸 궁내부 특진관,1902년 철도원 부총재로 경부철도부설 관여.1908년 시종원경,1910년 한일합병 때 민병석(閔丙奭)과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며 순종에게 합병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을 강요한 공으로 훈1등 자작(子爵)이 되어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됨,1919년까지 장시사장(掌侍司長)을 지냄.1925~40년 중추원고문.1940년 8월 중추원부의장,1938년 유림(儒林)의 유력자로 경학원대제학(經學院大提學) 겸 명륜학원(明倫學院) 총재.총독부의 전시정책 자문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고문,1939년 칙선귀족원 의원,이용구(李容九)의 아들 석규(碩圭)가 주최한 송병준(宋秉畯), 이완용(李完用), 이용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등에 대한 감사추모제인 일한합병공로자 감사위령제 참석.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고문 등을 거친 골수 친일파.
놈은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 물의를 일으켰다.
아내인 김복완(金福緩)은 일제의 침략전쟁 지원과 국방비 헌납 등을 설립목적으로 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회장으로 금비녀 헌납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놈은 고종황제의 독살설에 가장 깊숙히 간여된 인물이기도 하며 치마 속에다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를 넘어뜨려 옥새를 강탈한 후 순종에게 한일합방늑약에 옥새를 찍도록 강권했던 아주 나쁜놈이다.
놈은 인왕산에 프랑스식 별장(방40칸)을 지어놓고 천정에 유리를 깔어 금붕어를 헤엄치게 하였으며 또한 갑사 옆을 흐르는 계곡에 구곡을 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혼자만이 즐기려 하였고 간성장이란 별장을 지어(현재 전통찻집) 말년을 흥청망청 보냈다.
갑사구곡에는 놈이 남긴 수많은 암각문들이 남아 있는데 나라를 팔아 넘긴 매국노이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계룡산의 자연석을 석공을 시켜 네모나게 깎어내고 글을 새기는 등 자연을 파괴한 해악이 너무나 크기에 이곳을 지나면서 배경을 아는 이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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