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바로 알기

대덕구 송촌동(宋村洞) 이야기

돌까마귀 2022. 7. 31. 13:42

옛날 송촌이란 이름은 지금의 중리동까지 포함되었는데 쌍청당이 있는 마을은 하송촌, 동춘당이 있는 마을은 상송촌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상 송촌리는 만취촌(晩翠村)이라고도 불리었고 동춘당이 있는 곳이다. 하 송촌리는 백달촌(白達村)이었고 쌍청당이 있는 곳이다.  

 

전해오기를 목사공(牧使公 : 遙年)께서 차남 선무공(宣務公 : 汝楫)을 위해 상촌에 집을 짓고 만년에 그 집에서 많이 거처 하시었고, 선무공 자손도 또한 대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덕은가승 상 45p)

선무공에서 승사부군(承仕府君 : 世英)에 이르러서, 서울 회현방(會賢坊)의 집은 장자인 별좌공(別坐公 : 應祥)에게 물려주고, 송촌집을 차자인 임천공(林川公 應瑞)에게 전하여 내려와 현재 필자의 집이 되었다. 순조(純祖)34년 을미년(1835 헌종즉위년)에 종가 안채를 다시 옛터로 옮겨짓고, 옛 기둥에"丙申 七月七日 上樑 "과  "庚午分金"이라고 써 놓았는데 목사부군 때인 것 같다. 병신년은 바로 임천공이 왜란을 만나 강릉으로 피란가실 때이다. 그후 1848년(癸未年)에 문정부군(文正府君 : 浚吉)이 안채를 중건하셨다고 한다. (덕은가승 상 55p)

 

 

우암선생의 宋村詩帖에서

우암 선생은 문학면에서 볼 때 비문을 잘 지으시는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러면서 한시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우리말 노래인 시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敍情詩를 아주 잘 지으셨다.

특히 선생은 주자의 '운곡남간'을 즐겨 암송하셨고, 주자의 詩句에서‘판원'‘송촌'이라는 두 개의 詩語가 마침 시조공(대원)의 벼슬이름인 '판원'과 마을이름 '송촌'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간과하지 않고 일가들에게 시를 한편씩 지어주어 집안의 고사로 삼기를 바랐다.

선생께서 시의 제목을 서문처럼 길게 쓰고, 다시 발문을 남긴 것을 보더라도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했음이 분명하다.

가정이든 국가이든 역사는 만들어진 것만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간 사실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예이다. 송촌시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자대전에 근사체(近似體) 한 수가 있는데 그 서문에 이르되 “수일 전에 판원장과 함께 송촌의 약속이 있었는데, 눈 내리는 날에 회포가 있어 판원과 통판 두 어른에게 보냅니다.”하였다. 우리 집안의 족보가 판원사 부군에게 비롯되고 유조비 이후로 자손들이 백달 촌에서 살았다. 관아에서 다시 마을 이름을 송촌(宋村)으로 고쳐 송촌이 나라에서 유명해진 지 오래 된다. 지금 판원과 송촌이란 두 이름이 서로 부합되어 참으로 회옹(晦翁 : 주자)이 이른바 암암리에 일치되었다는 것이다. 그 일이 매우 기이하므로 감히 운자에 따라 그 뜻을 밝히니 원컨대 우리 일가들이 각각 한편씩 지어 우리 집안의 고사로 삼는다면 다행이겠다. (덕은가승 상 356p)

 

이 시는 가문과 주자의 가문에 보이지 않는 등급, 동질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의미를 그 속에 부여함으로써 자손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효과를 얻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암 선생은 자신의 이 시를 일가들이 적극 次韻(차운)하여 집안의 고사로 삼아줄 것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이 때 선생의 나이 81세 때 이었으니 선생이 가문의 번창을 위해 얼마나 힘썼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註  "덕은가승" 19세기 /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덕은가승은 동춘의 7대손 풍야 송정희(1802-1881)가 편저한 족보이다. 이 족보에는 동춘당 송준길이 사후 9년이 지난 1681년 문정이란 시호를 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연시연을 1686년(숙종12)거행 하였는데 그 잔치상에 오른 음식이 기록되어있다. 대상 30상 평상 200상을 차렸는데 궁중음식으로 구성된것으로 궁중음식이 사대부가에도 전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6.2.4 

(사)대전문화유산울림의 문화유산학교 송성빈 교장선생님이 발췌 정리한 글을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