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懸板)은 글씨나 그림을 새겨 건물의 문 위, 처마 밑이나 벽, 기둥에 다는 널판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을 총칭한다.
편액은 건물의 중앙 처마 밑에 걸려있는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칭하고, 건물에는 편액 이외에 건물의 지어진 유래를 알려주는 기문(記文)도 걸려 있는데 이러한 기문은 건물의 역사와 관련된 인물의 교류 관계를 알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누정(樓亭)에는 그곳을 들렀던 시인 묵객들이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오언절구(五言絶句)시를 담은 시액(詩額)이 걸려 있기도 하는데 건물의 기둥에 세로로 걸어 놓은것을 주련(柱聯)이라 한다. 현판을 걸어 놓는 문화는 고대 중국 진(秦)나라 때 부터 건물에 명칭을 표시하며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의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안동민속박물관의 안동웅부(安東雄府)가 있으며 모두 공민왕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유회당(有懷堂) 기궁재 (奇窮齋)
중구 운남로 85번길 32-20(무수동)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회당은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1668~1734) 이 뒷산에 있는 부모의 묘를 지키면서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쓰기 위해 1714년에 지은 건물이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인데 유회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건물로 활수담이라는 작은 연못이 앞에 있으며 앞면과 양쪽 면에 난간이 돌려진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내부의 방은 불기재(不欺齋)와 구시재(求是齋)라 하였으며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이 쓴 주련이 걸려 있는데 매사필구시(每事必求是) 모든 일에는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무락제이의(無落第二義) 의롭지 못한 일에는 빠지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인 기궁재(는 ㄱ자형 건물로서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 건너방, 부엌 등이 있으며 1920년대에 다시 지었다. 유회당과 기궁재는 1989년3월18일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고 이곳에는 유회당 권이진 선생이 아버지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지은 시묘소인 삼근정사와 선생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권이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외손자이다. 권이진은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
이 문집에는 시와 소(疏:상소글) 등이 실려있으며 유회당이 관직에 있던 1700∼1734년 사이의 많은 사료가 실려 있다. 권이진 선생의 증손자인 권상서가 순조 초에 판각한 것이며, 재질은 배나무와 소나무이다. 총 246판에 많은 사료가 실려있으며, 여러 외교자료와 『연행일기』그리고 성리학에 관련된 자료들은 당시의 학문과 국제정세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여경암(餘慶庵) 거업재(居業齋) 산신당(山神堂)
중구 운남로 85번길 54-153(무수동)에 있는 여경암은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이 문중 원찰과 교육장소로 쓰기 위하여 숙종 41년(1715)에 지었다. 여경암을 중심으로 앞쪽에 서당건물로 사용했던 거업재, 뒤쪽에 산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여경암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사마온공이 자제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강당인 ‘여경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인데, 좌우 뒤쪽으로 2칸씩 덧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여경암이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자제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강당이름인 여경사에서 따왔다. 여경(餘慶)은 주역(周易) 중지곤(重地坤)에 나오는 말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 라는 뜻이다.
여경암 바로 앞에 서있는 거업재(居業齋)는 권이진이 후학과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거업재는 앞면 6칸, 옆면 1칸 규모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꾸며 여름철 서당으로, 가운데 2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겨울철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머지 2칸은 부엌이다.
산신당은 고종 19년(1882)에 지은 건물로, 앞면·옆면이 1칸 규모이다. 단촐하게 지은 건물로 안쪽에는 불단을 만들어 산신탱화를 걸어 놓았다.
여경암, 거업재, 산신당이 함께 1989년 3월 18일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여경암에는 6장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는데 오른쪽 2장은 수덕사대전교육원(修德寺大田敎育院)과 보문산여경암(寶文山餘慶庵)이라 쓰여 있고 나머지 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분이 없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온 세계 누구와도 견줄 이가 또한 없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천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살펴봐도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 같으신 분 다시 없네
단재정사(丹齋精舍)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어남동) 도리미 마을에 있는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생가로 1993년에 목조 초가로 복원하였다. 단재(丹齋)는 신채호의 호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단(丹)자를 사용했다. 정사(精舍)는 학문을 가르치려고 마련한 집 또는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단재 신채호는 57년의 생애를 오로지 구국언론과 조국독립, 민족사학 연구에 바친 애국열사이다. 1991년7월10일 대전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을해년 국추절 후학 족제 덕선 근서(乙亥年 菊秋節 後學 族弟德善 謹書)라는 관지로 보아 1995년 가을 단재의 아우뻘 되는 인전(仁田) 신덕선(申德善)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봉소루(鳳巢樓)
중구 봉소루로 29(석교동)에 있는 봉소루는 조선 인조 때 장례원 판결사 벼슬을 지낸 봉소재 남분붕(鳳巢齋 南奮鵬)의 별서로 봉소는 봉(鳳 수컷, 凰 암컷)의 둥지를 이르는 말로 영재를 모아서 가르치는 집이라는 뜻이다.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14년 첫 번째 중수를 했고 1920년 무렵에 남분붕의 7대손 가운 남준식이 두 번째로 중수를 할때 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이 편액을 썼다. 윤집궐중(允執厥中), 유선시보(惟善是寶), 호서승경(湖西勝景), 산고수장(山高水長) 등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1992년10월28일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주련은 봉소루에서 바라 본 10경(十景)을 읊은 것으로
덕령상설(德嶺常雪) 덕고개에 눈 내린 풍경
고산효종(高山曉鐘) 고산사 새벽 종소리
안봉제월(安峰霽月) 안산에 뜬 맑게 개인 달
식장낙하(食欌落霞) 식장산에 지는 안개
계산화운(鷄山畵雲) 계족산의 그림 같은 구름
문성반조(文城返照) 보문산성에 되비치는 햇살
금병청풍(金屛淸風) 금병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고전관가(高田觀稼) 비옥한 들판의 농사일 구경
근시부연(近市浮煙) 가까운 저자거리에 밥 짓는 연기
장천어화(長川漁火) 긴 내에서 물고기 잡는 횃불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중구 대둔산로 137번길 67(안영동)창계숭절사는 1923년 세운 사당으로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박팽년(1417∼1456)과,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함께 복위운동을 도모하다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는 곳으로 숭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아래에는 상의당(尙義堂)이라는 강당이 있다.
창계(滄溪)는 물맑은 시내를 뜻하는 말로 유등천의 옛 이름이며 숭절(崇節)은 절개를 높이 따른다는 뜻이다.
1989년3월18일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박팽년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7년(1434) 문과에 급제한 후 단종 2년(1453)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는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는 중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심문 선생 역시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인 김종서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원래 정절서원(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의 위패를 모셨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헐려, 지금 있는 곳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7. 3. 31. 대전시 발행 '이츠대전'의 김민석 글에다 사진 몇장 첨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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