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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에서 발원된 사회봉사와 불사이군정신

돌까마귀 2022. 8. 1. 18:37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실천 / 황자후(黃子厚)

 

*생애 1363년(고려 공민왕12)~1440년(조선 세종22)
황자후는 조선 초기(태종~세종)의 문신이다. 자는 선양(善養) 또는 노직(魯直)이라 하며 본관은 회덕이다. 태종(재위 1400년~1418년) 때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인녕부사윤,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2년(태종12) 임진(壬辰)에는 호패법(戶牌法:호패는 지금의 주민등록증) 제정을, 1415년(태종15)에는 동전 사용을 건의하였다. 1421년(세종3)에는 좌군총제가 되어 정조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가 의학에 정통하고 오랫동안 전의관을 겸임하였기 때문이었다. 1425년에는 의술의 전문화와 세분화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침구의 전문직 설치를 건의하였다. 전의감의 운영에서의 개혁과 약재의 자급방안, 즉 약재의 중국 의존도에서 벗어나 국산화에 대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로 병을 다스리는 원리를 소개한 고려 시대의 의학서인 ‘향약구급방’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1438년(세종20) 노령으로 은퇴하였다. 그의 아들 유(裕)는 태종의 11째 따님 숙안옹주(淑安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회천위(懷川尉)가 되었다. 1440년(세종22) 경신(庚申)에 7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세종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회를 폐하고 회덕의 관동(지금의 대전시 동구 마산동)에 사람을 보내 예로써 장례를 지내주게 하고 시호를 혜의(惠懿)라 하였다.
황자후의 시호인 혜의(惠懿)는 혜급만민(惠及萬民:은혜가 만민에게 미치다), 호시의덕(好是懿德:남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따라서 좋아한다)에서 가져온 뜻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 사회봉사의 효시 미륵원
고려 말·조선 초에는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나 중앙의 관직으로 나가지 못한 선비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지방에 기반을 두고 향권을 지배하곤 하였는데 이들을 재지사족이라고 하였다. 대전의 재지사족들은 회덕, 유등천·갑천을 중심으로 터전을 형성하였다.
회덕 지역에서는 대대로 살아온 회덕황씨, 은진송씨, 진주강씨 등이 세력을 떨쳤다. 회덕황씨는 회덕의 토성으로 고려 말 인물인 황윤보로부터 회덕 지역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회덕황씨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지금의 대전시 동구 마산동 일대이다.

 

*미륵원지(彌勒院址)/대전시기념물 제41호/동구 냉천로152번길 80 (마산동)

미륵원은 마산동에 있었던 고려 시대의 원이다. 원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먼 길을 가는 나그네를 보호하고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길이 험한 곳이나 나루 등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었다. 고려 시대의 원은 대부분 국가나 사찰에서 설치하여 운영하였지만, 미륵원은 회덕황씨 가문에서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미륵원이 자리한 곳은 서울과 영,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므로 여행자들이 많이 다녔던 곳이다. 미륵원이 설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후기의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문을 닫았다가 1332년에 황연기라는 인물이 다시 운영하기 시작한 이래 손자 황자후에 이르기까지 3대 100여 년간이나 운영되었다.

또한 이색(李穡)과 하륜(河崙), 변계량(卞季良), 정인지(鄭麟趾),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에 정치·학문·문학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 찬한 제영기(題詠記)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청풍명월(淸風明月), 절의정신(節義精神)과 더불어 우리 지방의 향풍(鄕風) 가운데 하나인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대전사람의 후덕(厚德)한 인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한 불사이군의 정신/박팽년(朴彭年) 

 

*생애 1417년(태종17)∼1456년(세조2)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박팽년은 대전광역시 가양동(옛 더퍼리)에 살던 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팽년의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집대성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회덕 출신이다. 평소 거문고 타기를 즐겨해서 자칭 ‘취금헌’이라고 호를 지었다. ‘집대성’은 그가 학문에 통달하여 붙여진 호이다.

1434년(세종16) 문과에 급제한 이후 성삼문, 신숙주, 최항, 유성원,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국가의 중요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돌아가신 세종의 뜻을 받들어 황보인(黃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하였는데, 왕이 재위 2년만에 돌아 갈때세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며 남긴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도왔다.

1455년 왕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위협하여 왕위를 빼앗았다. 이 일이 있을 당시 박팽년은 1455년(세조1)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1455년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려고 하는 성삼문을 있는 힘껏 만류하며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이때부터 박팽년, 성삼문과 그의 부친 성승, 하위지, 유응부, 이개, 이성원, 김질, 상왕의 외숙인 권자신 등은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함께 모의한 김질의 밀고로 거사 계획이 탄로되어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등 사육신은 체포되어 왕에게 직접 취조를 받고 결국에는 처형 되었다.
어린 나이에 단종 복위 운동을 목격한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희생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의 행적을 자세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1691년(숙종17)에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 뒤 박팽년은 1758년(영조34)에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충정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박팽년 선생 유허/대전시기념물 제1호/동구 우암로326번길 28 (가양동)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메라
야광(夜光)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며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이시랴

그가 남긴 시를 통해 그의 평상시 군신상을 엿볼 수 있으며 높은 절개와 의리, 숭고한 충절이 오늘날까지도 국민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록 삼대가 화를 입어 오늘날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전해지지 않지만 유복자인 아들과 여종의 여식을 바꿔 길러 사육신 중 유일하게 대를 잇게 되었다.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쌍청당 현판을 비롯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박팽년의 유허비는 대전 가양동에 있고, 그의 묘는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와 함께 현재 노량진 사육신 공원묘지에 있다.

 

*세조의 회유를 거절한 박팽년
박팽년이 사형되기 전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돌려 나에게로 돌아와서 이번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 다고 숨긴다면 살려주리라” 하였다. 박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진사)’라고 부르며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의금부도사로 있던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공이 어찌 군부에게 불호하여 이런 화를 당합니까”라고 물으니 그가 탄식하며 “마음속이 불편하여 내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한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다. 다른 모의 자들과 그의 아버지는 능지처참되었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 3 형제 모두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아내·제수 등도 죄인의 가족이라 하여 관비가 되었다.

 

2018. 3. 3. 굿모닝 충청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