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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 법동석장승 (法洞石長牲) 이야기

돌까마귀 2022. 8. 1. 18:42

법동 석장승 (法洞 石長牲)은 장승이 아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 범천골의 돌장승(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은 1998년 대전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나무 장승이었으나  300여년전 대전 갑부 '송민노'가 지금의 돌장승을 세웠고,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돌장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天下大將軍, 地下大將軍은 장승(長栍)이 아니고 벅수(法首)라 불러야 옳다.

신라21대, 소지왕(炤知王)에 의해 서기 487년에 도입된 역참(驛站)제도의 한 부분으로, 나라의 땅과 길을 합리적으로 유지, 관리, 보수하고, 효율적으로 길을 안내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푯말'을 관로(官路)나 국도(國道) 길가에, 5리(里)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官)에서 세우고, 나라에서 관리를 하였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후(堠 / 댱승 후) 또는 장승(長栍)이라 하였으며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배기' 또는 '장승백이'라 불렀다.

 

장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 이웃 마을의 이름과 거리, 방향 등을 표시하였고, 머리에는 타지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유행병과 잡귀를 막아내기 위하여, 무서운 장수의 표정 또는 용(龍)이나 '치우천황'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여 세웠다.

 

그리고 마을 어귀나  당산(堂山)에 세워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벅수(法首)라 한다. ("조선 옛말 사전" 1949, 이상춘, 을유문화사).  단순하게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과는 관련성이 없는, 서로 다른 것이다.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에는, 1890년 무렵  인천시 만수동 별리고개 '장승배기'에서 수집해 간, 큰 장승이 전시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장승중에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명품 장승이라 할수 있다. 가슴에 쓰인 명문(銘文)에는 "이곳은 '인천의 관문'에서 10리 못 미쳐에 있는 '성현마을'이고, 서쪽으로 20리에는 '제물포'가 있으며, 동북쪽으로 60리에는 '서울'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민속박물관"에는, 1890년 지금의 북한 땅 김화 지역의 '장승배기'에서 수집하여 가져 간 작은장승이 전시되어 있는데가슴에는 "이곳은 '서북마을'이고 '금성현(金城縣)'까지는 30리가 남아 있다".라고 쓰여 있다. 아래쪽의 글씨가 없는 부분이 잘려져 있어 아쉬움이 크다.

 

조선시대의 판소리, 변강쇠타령의 노랫말에는, "변강쇠가 경상도 함양 동구 밖, 마천고을가는 큰 길가의 장승땔감으로 뽑아 불 태웠다가, 전국 8도장승들의앙갚음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 여기서 노래하는  장승이 바로 그 장승이다.  만약 변강쇠가 뽑아 불태운 것이 장승이 아니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벅수'였다면, 변강쇠타령의 노랫말은 "전국 8도 장승들의 앙갚음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가 아니라 "마을 원로들의 지시를 받은 마을 청년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불리웠을 것이다.

 

또 다른 판소리 박타령(興夫歌)의 노랫말에는 "넓은 들녘에  늘어서 있는 를 보면, 대촌고을 어귀의 당산에 길게 지어 서 있는 '법슈' 연상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법슈' 벅수의 옛 말이고,판소리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즉 벅수(法首)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구별할수 있다.

 

조선시대, 일십당 이맥(李陌)이 목숨을 걸고 쓴 상고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白逸史 1520)의 내용에는, "우리의 조상 인 '단군왕검'이 곧 '선인법수(仙人法首)다."라고 기록 하였으며, "하늘 아래의 다섯 방향(동서남북과 중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天下大將軍'이라 하고, 지하의 다섯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地下大將軍'이라 한다" 라고 쓰여 있다. 즉 법수를 뜻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태백일사의 내용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하여,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350여년을 숨어 지냈으나, 1800년대 후반에 밀려 온 개화기에이맥의 후손, 해학 이기(李沂)에 의해 제자들에게 공개되어 알려졌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라는 명문도 이 즈음부터 여러 마을의 서낭당 당산(堂山)의 벅수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그러다 구 한말 대한제국 개화기 시절 우편제도(郵遞司)의 도입(1884)으로, 역참(驛站)제도는 폐지(1895)되고,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도 새로 세우지 않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장승이나 벅수를 새로 만들어 세워도, 묵은 장승이나 벅수를 치우지 않고, 세워진 자리에서 완전하게 썩고 넘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때 까지 내버려 두는 뿌리 깊은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장승이란 실체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그 누구도, 조선시대의 장승이란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장승에 관한 옛 그림 한점 남겨진 것이 없고, 오직 한시(漢詩) 몇 구절과 고전 판소리 타령 속의 노랫말 몇 가락 만 남아 전하여 지고 있을 뿐, 우리 땅에서 장승은 완전하게 소멸되고 만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은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민속신앙의 뿌리"라고 할수 있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法首,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를 망령된 신앙 미신(迷信)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깍아내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전에  이미 우리땅에서 완전 소멸하여 흔적도 없는 장승으로 분류, 합치하고, 벅수를 장승으로 부르고, 쓰도록 강요하고 교육하였다.

<1933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 확정 발표>

또한 총독부는 고려시대에 사찰(寺剎)에서 운영하였던 서민들의 돈놀이조직(私債業)인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는 장생표주(長生標柱, 國長生, 皇長生)가 '장승의 근원' 이라는 뚱딴지 같은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우리의 학자들은 한마디 반론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떼를 그대로 받아 들여, 지금도 그들이 쓴 책자 논문에는 장생고와 장생표주를 장승의 유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을 한 우리의 학자들은, 일본 교수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배웠고, 그들이 또 제자들을 키워, 해방된지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민속학자라는 그들은 우리의 수호신 '벅수'를 '장승'이라 부르며, 꾸준하게 책을 쓰고, 논문도 발표하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 백과사전,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조차 벅수를 장승으로 부르며,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으니, 우리의 후손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사람의 석수장이(石工) 솜씨로 짐작 되는 대전의 돌장승 들

우리나라 벅수(法首)의 역사를 살펴보면, 300여년 전 1700년대의 벅수에서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는  명문(銘文)을 찾아볼수가 없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란 명문은, 위에서 언급한 1800년대 개화기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범천골 돌벅수는 300여년 된 벅수라고 할수 없다. 2003년, 범천골 돌벅수를 사진 찍을 때 현장에서 만나 뵌 80대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웃 마을 국민학교의  교감선생이던 남편이 6.25전쟁때  범천골 돌벅수에 새겨진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을 쓴 인연으로, 남편이 보고 싶을 때 자주 이곳 당산을 찾아 온다고 하였다. 범천골 돌벅수가 300여년 전에 세웠다는 소문(說)은 벅수옆에 세워진 선돌(立石)을 두고 하는 이야기로 추정 된다.

 

<천하대장군>

 

<천하대장군 옆의 선돌>

 

<지하대장군>

 

<지하대장군 옆의 선돌>

 

그리고 이웃 마을에는  범천골 돌벅수와 같은 때, 같은 석수의 솜씨로 보여지는 벅수들이 더 있다.
대덕구 읍내동의  뒷골 돌벅수는 "1920년 무렵, 큰 물난리 때 마을의 수호신이던 돌탑이 무너져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자, 마을의 유지 '백조근'이 돌벅수를 세웠다" 라고 전해진다.  

뒷골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회덕현(懷德縣)의 관아 뒤쪽의 마을이라 뒷골(후곡 後谷)이라 불렀다.

동구 용운동의 용방이마을 돌벅수는 마을에 전염병과 재앙(災殃)이 심하게 돌아, 그 피해를 막아내기 위하여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을 쌓았으나, 여러번의 물난리에 무너지기를 반복하자 1930년 무렵, 무너진 돌탑 옆에  마을사람 '임현빈'이 고향땅 경기도 광주의 수호신을 모방하여, 로 만든 장신(將神)을 세웠다 라고 전해진다, 용방이마을은 조선시대 광해군의 폭정을 피하여,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살았든 풍천 임(林)씨들이 내려와  모여 살던 집성촌이다. 

그렇지만 법동의 범천골 벅수와, 읍내동의 뒷골 벅수, 용운동의 용방이 장신은, 만들어진지 어림잡아 80여년 밖에 되지 않었지만, 같은 시대  같은 석수장이(石工)의 솜씨로 만들어 진, 대전을 상징하고, 대전을 대표하는 특징이 뚜렷한,  명품 돌벅수들이라 할수있다.

 

2018. 10. 6. 황준구(9339june)님의 장승이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