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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바로 알기

돌까마귀 2023. 10. 10. 12:40

항일 무장투쟁의 독보적인 존재 여천(汝天) 홍범도 장군(1868~1943)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흉상 이전에 이어 이제는 홍범로장군로 폐지 움직임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기구한 삶 불구 일평생 무장 독립투쟁에 헌신하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의 외성 서문 안에 있는 문열사 앞마을에서 가난한 농부(또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해산 후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숨졌고, 아버지 홍윤식 역시 고역에 지친 나머지 병에 걸려 1877년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작은아버지 댁에서 자랐지만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웃 마을 지주 집의 꼴머슴으로 들어가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시절 삶이 얼마나 기구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다.

 

장군이 나고 자란 시기, 조선은 폐망을 앞두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등 그야말로 격변(激變) 그 자체였다. 만 15세가 된 1883년, 평양 감영에서 병정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는 17세 이상이어야 입대할 수 있었지만 제법 큰 덩치 때문인지 나이를 속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나팔수(코코수)로 근무하게 됐다.
그가 군인으로 근무한 1883년~1887년에는 수많은 민란이 발생했다. 1884년 12월 함경도 안변‧덕원 등지에서 농민들이 수세(收稅) 문제로 소요를 일으켰는데, 군인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홍범도 장군 어린 시절 기구한 삶…4년 군 복무 이어 제지소 근무도
비록 생계를 위해 군인이 되긴 했지만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군 내부에서의 부조리도 심각했다. 장교들의 부패는 도를 넘었고 걸핏하면 구타가 자행됐다. 그러던 중 같은 부대 장교와 시비가 붙어 그를 구타(또는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도피자의 신세가 된다. 4년여의 군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백발백중 사격술과 각종 전략을 익히는데는 큰 도움이 됐다.

19세가 된 장군은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제지소로 찾아가 다시 일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닥나무를 재료로 해 한지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차츰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제지소 주인은 수차례 동학을 믿고 그 조직에 참여할 것을 권했고, 점점 이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장군은 주인에게 밀린 삯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동학교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기 일쑤였다. 격분한 장군은 주인을 넘어뜨려 폭력을 행사하고 만다. ‘홍범도 일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주인 3형제를 도끼로 찍어 죽이고 그날 밤으로 도망해 산으로 은신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러나 “자료나 근거는 희박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장군은 두 차례에 걸쳐 폭력(또는 살인)을 행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는데, 장군의 삶 전체를 놓고 판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장군은 22세 때인 1890년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가 자담 스님의 상좌(上佐)가 되어 생활하게 된다.

덕수이씨 가정에서 태어난 자담으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운 서산대사와 사명당, 이순신 장군 등의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일제에 대한 반감과 독립의식을 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산중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근 절에서 여승으로 있던 단양이씨를 만나 연정을 느꼈고, 결국엔 선을 넘고 만 것이다. 이씨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려 했으나 중간에 건달패를 만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씨는 고생 끝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을 낳았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장군은 강원도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3년을 지낸 뒤 1895년 은거 생활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짧은 승려 생활 끝에 김수협과 우연히 만나 의병운동에 나서 같은 해 9월 18일 장안사로 넘어가는 길 정상 단발령 고개에서 김수협을 우연히 만나면서 의병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1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다량의 무기와 전리품을 노획하는가 하면 산포수와 농민 출신 44명을 모집해 본격적인 의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충북 제천 출신 의병장 유인석 부대에 합류하기도 했으나, 몇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김수협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홀로 된 장군은 일본군과 밀정을 피해 영풍지방으로 은신했고, 금광의 인부로 활동하다 다시 의병투쟁을 벌이면서 일제를 압박해갔다.

그러던 중 다시 이씨를 만나 약 7~8년 동안 오붓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산포수 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장군은 일제에 의해 ‘총포화학류 단속법’이 공포되자 본격적인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직업 포수들로 구성된 북청군 안산사 포연대 대장으로 뽑힌 그는 1907년 11월 15일 후치령에서 일본군 수비대‧경찰과 최초의 교전을 벌여 이들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후에도 일본군 화물호위병을 급습하거나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연파했다. 이때 장군 휘하에는 약 300명 안팎의 의병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육군 제50연대 3대대장 미키 소좌가 이끄는 토벌대를 꾸려 대대적인 공격에 들어갔고, 장군이 이끈 의병은 갑산의 수비대와 주재소, 우편취급소 등을 습격하는 등 전과를 이어갔다. 동시에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일진회 회원들도 척살했다. 그러자 일제는 부인 이씨를 납치해 장군의 귀순을 종용하게 된다. 이씨가 온갖 고문에도 말을 듣지 않자 장남 양순을 이용해 귀순 편지를 들고 장군을 찾아가도록 하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 당한 부인 옥사, 장남 양순은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
결국 이씨는 옥사했고, 양순은 의병이 되어 싸우다 1908년 6월 16일 전사했다. 이후 장군은 국내에서의 의병전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절감하고 국경을 넘기로 작정했다. 장기전을 위한 결단이었다. 이처럼 1895년(27세)부터 1908년(40세)까지 12년간의 치열한 항일전은 그 누구도 해내기 어려운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군은 부인과 아들을 잃었지만 그의 독립정신은 더욱 굳건해졌다.

장군의 유격전은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 홍범도’로 부를 만큼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1908년 11월 압록강을 넘어 간도로 넘어간 장군은 다시 1909년 초 연해주로 이동해 그곳에 있는 의병부대와 힘을 합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일본측에 거슬리는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26일 이뤄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간도는 물론 러시아 의병운동에도 일대 전기를 마련해줬다. 장군은 최세원이라는 청년이 마련해 준 4980루불을 통해 청년 30명으로 새 의병부대를 조직, 함경도 무산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으나 첫 패전을 겪었다.

다시 1910년 3월 약간의 의병을 이끌고 만주 장백현 왕개둔으로 들어갔다. 국망 직전인 그해 6월 연해주에서 국내외 의병을 단일 지휘계통으로 통합할 목적으로 하는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됐다. 장군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편성 직후인 8월 국망(國亡)을 당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치(國恥) 소식을 들은 장군은 이상설 선생 주도로 설립된 성명회(聲明會)에 참석해 반드시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

3.1 독립만세운동 등에 힘입어 대한독립군 창건…국내 진입 작전도
이후 장군은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등에 힘입어 대한독립군을 창건, 다시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국내 진입 작전도 대담하게 진행했고 크고 작은 전과도 올렸다. 특히 1920년 6월 7일 치러진 봉오동전투는 장군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쾌거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충남 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일제강점기 봉오동‧청산리의 대첩 등 무력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승리의 축배도 잠시.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역 한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한인 마을을 수색해 청년들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고 여성들을 욕보였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인은 3469명, 이후 3~4개월 동안 희생된 사람은 약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는 또 마적단까지 이용해 독립군과 한인을 학살했다.
장군은 1921년, 53세가 되던 해 의병 700명을 이끌고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령 아무르주로 들어갔다. 1920년 늦여름 소비에트 노동정부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권위원 사이 체결된 비밀 군사협정, 즉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 독립군 부대의 시베리아 주둔 및 양성을 승인하며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기로 약속한다”는 조항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무르주에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 중 일부, 최진동의 총군부 등 약 4500명의 부대가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 1921년 6월 28일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게 된다. 외견상으론 무장해제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그 배경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쟁으로 분석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 사변을 막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다.

봉오동‧청산리대첩 승전에 일제 잔혹한 학살…조국 광복 못 보고 생 마감
장군의 노년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 장군은 일제의 암살 시도와 밀정에 시달렸으며, 1923년 1월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이 이끄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출범하면서 일본군 재침입 방지를 명분으로 한인 무장병력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장군은 옛 전우 50여 명과 함께 농업조합을 만들었지만 사회주의 체제로 인해 판로가 막히는 등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1926년 이인복과 재혼했고, 집단농장을 유지하려면 당원 자격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강화와 맞물려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고, 1927년 7월에는 그동안 피땀흘려 개간한 카잘린의 농지를 떠났으며 우여곡절 끝에 소련 정부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에 정착하게 됐다.
장군은 73세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에 보내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은 바로 적국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항일정신이 여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 산체프나야 거리 제2번지에 있는 자택에서 아내와 손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가 평생 꿈꿨던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장군은 숨지기 며칠 전 옛 동지들을 집으로 불러 기르던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일제의 패망을 어느 정도 예견하면서 노병들을 격려하기 위한 차원이었을 것이다.
장군의 유해는 마을 인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서거 8년째인 1951년 새로운 묘비가 세워졌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에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치산 대장 홍범도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다."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통해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국난(國難)이 없었다면 그 존재가 알려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의기를 품고 일어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무관(武官)의 위치라면 더더욱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면 당 태종 30만 대군에 맞서 고구려를 지켰던 양만춘 장군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나섰던 신라의 김유신 장군, 그리고 오천 결사대를 이끌고 백제를 구하고자 나섰던 계백 장군이 바로 그들일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때론 평범한 사람을 투사로 만드는 것이 역설적으로 난세(亂世)의 힘 아닐까 싶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사에 있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빼놓는다면 ‘앙금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시에 대외적으로도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주역 홍범도 장군…한민족의 의기를 드러내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돼 있는 헌법 전문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의 독립이 외세의 손에 의한 것만이 아닌 우리 스스로 일군 값진 성과라는 점을 가장 큰 목소리로 웅변해주는 것이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산포수 의병을 이끌고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상대로 다양한 전과를 내 온 장군에게 1910년대 후반은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게는 고무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군이 대한독립군을 창건한 것 역시 이같은 정세 변화 속에서 이뤄졌다. 장군은 1919년 8월 하순 대한독립군 진영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체코제 최신식 무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대한독립군 규모는 약 300명으로 소대-중대-대대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장군은 진영이 갖춰지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함경도 혜산진에 들어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섬멸했는데 이것은 3.1운동 이후 치러진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으로 기록됐다. 동시에 장군은 더욱 막강해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여타 독립군 부대와의 연합전선 구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로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이들 연합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은 총 24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 봉오동전투…독립군 병사들과 한인 사회 영웅으로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는 봉오동전투는 작은 애초 작전에서 촉발됐다. 독립군 30여 명이 함경북도 종성 북방 5리 지점 강양동으로 진입해 일제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으로 무사히 건너 귀환했는데, 평소와 마찬가지인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러자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19사단은 즉시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인솔하는 월경 추격대를 편성,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해 독립군을 공격하러 나서기 시작했다.
장군은 일본군의 진입을 예상하고 먼저 주민들을 모두 산중으로 대피시킨 뒤 작전명령을 내렸다.
장군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6월 7일 봉오골 저수지 북쪽 10km 떨어진 지점에서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

 

“6월 7일 상오 7시에 북간도에 주둔한 우리 군 700명이 북로사령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할 새, 불의에 동 지점을 향하는 적군 300명을 발견한지라, 동 군을 지휘하는 홍범도‧최명록(최진동) 양 장군은 직접 적을 공격하여 급사격으로 적의 120여 사상자를 내었으며, 적이 궤주함에 따라 바로 추격전을 펼쳐 현재 전투 중에 있다.” (1920. 6.20 독립신문)

임시정부 군무부가 발표한 ‘북간도에 재한 아 독립군의 전투정보’에는 봉오동전투에서 적군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전과를 올린 것으로 나와 있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경미한 편이었다.
중국신문 ‘상해신문보’는 “독립군이 산길을 모두 잘 알고, 사로(四路)에 잠복하여 기습공격을 했으므로 일본군은 대피했으며, 당시 전사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강을 건너 도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 이후 크게 앙양된 독립군의 사기와 함께 지휘관이 지리적 이점을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장군은 독립군 병사들과 한인 사회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특히 봉오동전투는 4개월 뒤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져 독립군 사기 진작에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장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대승한 뒤 7월 열린 주민 환영식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나는 국권회복에 뜻을 둔 지 이미 10년의 세월이 지났으며, 공연히 독립의 의군을 일으켜서 한족의 독립을 절규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그간 고국의 산천을 떠나서 타국의 산천에 유리곤빙하여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로부터 금곡의 의연을 받은 것이 참으로 심대한 바 있다. (…) 우리들 독립군 일단은 일의 성‧불성을 논하지 않고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소지 관철하여 분투함으로써 한족 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이를 설욕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른바 ‘간도 지방 불량선인 초토 계획’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군은 물론 마적까지 동원해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군은 1920년 8월 하순경 부대를 이끌고 백두산 기슭의 두도구‧이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다른 연합부대들도 모두 봉오동을 떠나 장정에 올랐다.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 청산리는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사는 용정촌에서 약 40km 거리였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첩산을 교민들이 일구고 있었다.

일제 ‘간도지방 불량선인 초토 계획’ 강화…훈춘사건 빌미로 간도 출병

일제는 같은 해 10월 2일 마적의 수령 장강호를 매수해 400여 명으로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했다. 이 사건으로 시부아 경부와 가족 등 일본인 9명이 살해됐고, 일제는 이를 빌미 삼아 일본영사관 보호와 마적 토벌을 명분으로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제19사단 병력을 불법 출동시켜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를 무차별 학살했다. 봉오동 참패에 대한 보복과 함께 간도 출병의 명분을 위한 처사였다. 이어 10월 14일에는 공개적으로 간도 출병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훈춘에서만 조선인 240여 명이 학살되고, 한인회와 독립단 조직이 파괴됐다. 일제의 만주지역 조선인 학살도 본격적으로 자행됐다. 일제가 간도에 파병한 병력은 각 사단에서 차출한 2만5000여 명 규모였다.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8월 중순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일대로 옮겨 남완록구와 북완록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군사기지를 구축했다. 뒤이어 안무의 대한국민회군과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등 반일 무장 단체들이 차례로 도착해 강력한 연합부대를 형성하게 됐다.

 

김좌진 장군 등과 청산리대첩 이끈 홍범도 장군…국민적 자존과 결기 보여줘

역사적인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도발로 시작됐다. 1920년 10월 17일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 아즈마지대는 야마다 연대장에게 20일을 기해 청산리 일대 독립군을 포위‧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야마다 연대는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 북로군정서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청산리 계곡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때 충남 홍성 출신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백운평 일대 직소택에 매복해 있다가 21일 오전 9시경 일본군 척후병이 들어오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이어 일본군 주력부대가 기관총 등 중무기를 앞세워 몇 차례 돌격을 시도했으나 300여 명의 독립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여 명이 사살됐다.

이렇게 청산리대첩은 이렇게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골자전투 등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들 전투 모두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한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국치(國恥) 이래 독립군이 이룬 가장 빛나는 전과였다. 독립군 중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정규군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최강의 병력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00명으로 추산했으며, 중국의 ‘요동일일신문’은 약 2000명이라고 보도했다. 반면 독립군 측은 약 35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군 역시 다리 쪽에 관통상을 입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세윤은 그의 책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에서 “어떤 면에서는 청산리 독립전쟁의 주역은 북로군정서 부대가 아니라 오히려 홍범도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군대가 규모가 크고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갖추고 있어 강한 전투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백 리 길을 강행군하여 이동했고, 도착 직후 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며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청산리 일대에 도착해 훈련과 식량 조달 등 적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청산리대첩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듯하다. 홍범도‧김좌진‧이범석 등 지휘부의 전략과 무명 독립군들의 애국심, 그리고 이 지역 한인 사회의 죽음을 무릅쓴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통해 독립군은 식민지 시대의 굴종을 어느 정도나마 씻게 되었고,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었던 것이다.

자유시 참변, 공산당 입당에 대한 전문가들 견해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종섭 국방부 장관(전) 등 윤석열 정부 인사들이 육군사관학교(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사실상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내세운 핵심 논리는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이다. “(북한 등)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육사에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의 흉상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이른바 ‘자유시 참변(1921년 6월 28일)’ 개입설이다. 장군이 가해자들 편에 서서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선 자유시 참변에 대해 알아보자. 자유시에서 약 5km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한 한인 부대 사할린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을 말한다.
그 배경은 이르쿠츠크파(노령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 주도권을 둘러싼 파쟁이었는데 무장 독립투쟁 사상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 학살?…“그런 기록과 주장 있으면 가져오라”

“세칭 자유시 참변은 한국 혁명운동사상 너무나 불행한 참변이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적군에게 당한 일대 참변이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이르쿠츠파 대 상해파 사이 대립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은 너무나 복잡하다. 레닌 정부, 코민테른, 극동공화국 정부 및 볼셰비키 현지 당들이 한인의 역량을 총체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한인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파, 준공산파 내지 공산파와 모두 적당한 관련을 맺어 오다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그 모순이 폭발되고 만 것이다.”(김춘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간도 지방 한국 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이 참변으로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은 두 세력을 조정하고자 무척 노력했으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장군은 그해 5월 6일 자유시에 집결된 각 군사 단체의 통일 문제를 협의했고, 러시아 측의 지원을 받아 일제와 투쟁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강사는 유튜브를 통해 “홍범도 장군이 우리 독립군을 궤멸시켰다? 민족 반역자다? 정말 뒷목을 잡을 일”이라며 “장군은 당시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을 지지하긴 했지만, 소련 적군이 고려혁명군 일부와 대한의용군을 공격할 때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참여했다는 기록이나 주장이 있으면 가져와라. 어디에도 없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특히 “오히려 장군은 내분으로 상해파 독립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 장교들과 함께 솔밭에서 땅을 치고 원통해 했다는 증언만 남아있다”며 “실제로는 홍범도뿐만 아니라 안무, 지청천, 최진동 등 의병장들은 3~4km 떨어진 수라세프카라는 도시에 있었다는 완벽한 기록이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에 대해 알아보자. 입당 시기는 1927년 10월로, 전문가들은 공산주의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항일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인 동시에, 동지들을 이끌고 집단농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원 자격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련 공산당 입당도 논란…전문가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에 불과”

김상기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굿모닝충청>과 통화에서 “최근 자료를 통해 제기되는 주장에 따르면 장군이 당시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시 참변과 연관성이 없고, 오히려 유혈사태를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김 명예교수는 “관건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공산주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이라며 “해방 직후 냉전시대 공산주의와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는 같다고 볼 수 없다.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정신적 무장을 위해 이념이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휘 초대 국무총리 또한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레닌 정부와 협력해 독립운동을 지원받기도 했다”며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 장군 또한 일본군과 전투를 이어가기 위해 레닌에 협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같은 주장은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 9월 25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힌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이 회장은 “장군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뭐든지 잡으려(지원받으려) 했다”며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와 혼동해선 안 된다”며 “장군을 공산주의자라고 배척한다면 카자흐스탄의 50만 (고려인) 동포를 다 배척해야 한다. 왜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국민의힘 소속인 김태흠 충남지사 역시 지난 8월 29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속에서 좌우가 같이 했다. 공산주의의 문제점이 많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며 “광복 이후,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 전쟁과 맞물려서 판단해야지 그 전에 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육사의 뿌리가 어디냐에 대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지금은 물러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지난 9월 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서울동대문구갑)이 “육사의 정신적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인가, 국방경비사관학교인가?”라고 묻자 미 군정 시절 국방경비사관학교라고 답한 것.

육군사관학교 뿌리는 신흥무관학교 등 항일 무장 독립투쟁

그러나 전문가들은 항일 의병운동에서 시작해 신흥무관학교, 한국광복군 등으로 이어지는 정신적·인적 유산을 육사가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신으로, 한국광복군 연구 전문가로 알려진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육사에서 장군을 비롯해 독립군 관련 다섯 분을 모신 것은 아마 우리나라 군인 정신이라든지 군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그런 취지로 세운 게 아닌가 생각된다”며 “군인 정신을 제대로 함양하고, 지도자들에게 그런 정신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흉상은 육사에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충남 예산 출신 윤봉길 의사의 손녀 국민의힘 윤주경 국회의원(비례)은 “관장님, 홍범도 장군을 육사에서 그리고 우리 군에서 어떻게 예우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리하면 장군은 자유시 참변 발생 당시 어느 한 편에 서서 다른 쪽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지 않았고, 공산당 가입 전력은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또한 육사의 정신적 뿌리 역시 항일 독립운동에 있는 만큼 장군에 대한 현재의 논란은 전혀 근거가 없고 불필요하다는 얘기다.
백번 양보해 장군의 생애에 있어 일부 오점이 있다 치더라도 그걸 꼬투리 삼아 현시점에서 논란을 일으킨다면 과연 어느 국민이 국란의 위기 속에 다시 목숨 건 투쟁에 나설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이미 체제 경쟁이 끝난 시점이라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다.
특히 평생을 항일 무장 독립투쟁에 앞장섰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라는 빛나는 전과를 올린 장군을 욕보이는 현 상황에 대해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씁쓸한 입맛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카자흐스탄이 제공한 홍범도 장군 사망증명서

 

 

출처 : 굿모닝충청 2023년 10월에 연재 된 김갑수 기자의 기사 퍼옴

(주) 이 기사는 ‘홍범도 평전(김삼웅 저)’,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정세윤 저)’, ‘홍범도 장군(반병률 저)’ 등 도서와 함께

독립기념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고 및 인용해 작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