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15일 전국 TV에는 지강헌 일당의 인질극이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이들은 1988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탈주했다.
당시 탈주범 25명 중 12명이 서울 시내로 잠입, 그 중 7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됐지만 나머지 5명 중 4명이 15일 밤 9시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일반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인질극을 벌인 무리는 지강헌(당시 35세), 강영일(21), 안광술(22), 한의철(20) 총 4명이었다.
인질로 잡힌 가장 고씨는 다음날인 16일 오전 4시쯤 탈출에 성공해 집 근처 파출소에 신고했다.
이에 경찰은 무장병력을 포함해 1000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일당을 포위했다.
지강헌 일당은 경찰과 대치하며 실랑이를 이어갔다. 해당 장면은 모두 TV로 실시간 현장 중계됐다.
16일 낮 12시쯤 강영일이 경찰과의 협상을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집 안에 남아있던 안광술, 한희철은 당시 지강헌이 탈주 때 챙긴 호송교도관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구체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지강헌은 경찰 측에 영국 유명 밴드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했다. 그는 노래를 틀고 집 안 창문을 깬 뒤 유리 파편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인질들은 비명을 질렀다. 경찰은 지강헌 일당이 인질들에게 해코지 한 것으로 판단해 지강헌 다리와 옆
구리에 총 2발을 쐈다. 그 즉시 지강헌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했다.
인질로 잡혀있던 일가족은 경찰특공대원의 투입으로 모두 무사히 구출됐다.
사진은 인질극이 모두 끝난 뒤 체포되는 강영일의 모습
당시 지강헌을 포함한 탈주범 일부는 보호감호제도에 불만을 품고 탈주를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호감호제도는 실형을 선고받은 후 형을 마친 이들을 시설에 수용해 교화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인권침해 등을 이유로 2005년 8월4일 폐지됐다.
560만원을 훔친 절도범 지강헌은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 남동생인 전경환이 70억원을 횡령하고도 3년 만에 가석방된 사실에 격분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지강헌은 이렇게 탈주를 결심했다.
인질극 당시 지강헌은 자신의 범행 동기를 밝혔다.
그는 "나는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며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내 인생을 버렸다"라고 말했다.
이어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나라 법이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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