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조선인 136명 수몰된 일 해저탄광, 지난달 발견
잠수부 투입 발굴 계획…유골이라도 귀향할 수 있을까
“아버지, 저 왔습니다.”
26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바닷가 근처에 갱도 입구를 드러낸 조세이 탄광 앞에 마련된 제사상 앞에서 전석호(92)씨는 큰절을 올렸다. 휠체어에서 겨우 몸을 추스른 그는 아버지 전성도씨를 비롯해 1942년 이곳에서 일어난 수몰사고 희생자 183명을 위한 제사상에 절을 마치고도 바닥에 머리를 댄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어느덧 말라버렸을 것만 같던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한쪽에서 구슬픈 ‘아리랑’이 흘러나왔고, 유족과 한·일 시민들뿐 아니라 취재진 사이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씨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 야마구치현 도코나미 바다 밑 해저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였다. 조세이 탄광 갱도 입구는 높이 160㎝·넓이 220㎝에 불과했고, 갱도 안은 성인 남성이 허리를 펴기 어려운 정도로 좁았다. 이날 현장에서 본 갱도 입구는 절반쯤 물에 잠긴 채 바다 밑으로 막다른 길이 이어질 것 같은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바다 밑 땅 속으로 1㎞ 넘게 이어진 탄광은 이어지고 있었다. 석탄을 캐고 있으면 머리 위로 배가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할 정도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해저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했다.
위험천만한 작업을 이어가던 조세이 탄광에서 1942년 2월3일 오전 9시30분께, 갱도 위를 짓누르던 바닷물이 탄광에 난 틈을 파고들어 오면서 대형 수몰사고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오갈 데 없는 공간에서 183명이 꼼짝없이 수장됐다. 조선인 희생자가 전씨 아버지를 포함해 136명이나 됐다.
이들은 주검조차 뭍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 탄광 쪽은 인근 사찰인 사이코지(서광사)에 희생자 위패를 마련해 서둘러 사후 처리를 끝냈고, 이후 갱도 주변을 수 미터 높이 흙으로 덮은 뒤 평지처럼 만들어 입구조차 찾을 수 없게 했다.
지금도 바다 위에는 탄광 내부에서 올라온 원형 콘크리트 배기통인 ‘피야’ 두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어 여전히 수몰자들이 그 자리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역 신문인 ‘조세이신문’은 “2차 대전 도중 일본 최대 규모의 탄광 수몰 사고인데도 언론에 사고 발생과 희생자 수밖에 보도되지 않았다”며 “주검들이 해저에 묻힌 채 종전과 함께 탄광이 폐쇄됐고, 수몰 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이 비명에 사라졌던 조세이 탄광 입구에 82년 만의 햇빛이 처음 스며든 것은 지난달 25일이었다. 일본 시민단체인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水非常·수몰사고 )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중장비를 동원해 갱도 입구를 확인한 것이다.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입구 추정 지역 주변을 이틀에 걸쳐 샅샅이 파냈고, 거대한 흙더미 사이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드러났다. 입구를 막고 있던 두꺼운 송판마저 깨자 바닷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82년간 가라앉아 있던 비극의 역사가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새기는 모임'은 한국 유족들에게 연락해 갱도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다는 뜻을 확인하고 이날 추도식을 진행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는 “이달 말 유해 발굴을 위해 갱도 안에 잠수부 투입이 예정됐는데 한 조각 유골이라도 발견되면 모시고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조선인 노동자들 유해와 함께 이들의 가혹한 역사가 묻혀 있다. 조선인 김원달(당시 27살)씨가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참혹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머니, 저는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의 탄광에서 일하고 있어요. 바다 밑으로 갱도가 뚫려 있고, 위로는 어선들이 내는 ‘통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1932년 개업한 조세이 탄광은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모집’ 형태로 동원된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통해 석탄 생산량을 급속히 늘려간다. 이 탄광은 조선인들이 유난히 많아 ‘조선 탄광’으로 불렸고, 탄광 내에서도 가장 힘들고 위험한 구간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배치됐다.
이들은 갱도 가장 깊은 곳에서 하루 12시간, 1일 2교대로 쉬지 않고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 김씨 역시 날마다 해변에 지어진 갱도 입구에서 ‘석탄 구루마’를 타고, 바다 밑으로 1㎞가량 이어진 해저터널 형태의 탄광에서 석탄을 캤다. 가혹한 노동이 끝나면 포로수용소 같은 숙소에 갇혔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 가혹한 폭력을 가하고, 밥을 주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래도 걱정마세요. 꼭 여기서 탈출해서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갈게요”라고 편지를 맺었다. 하지만 탄광 수몰 사고로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이날 추도식에 김씨의 손자가 참여해 그의 애달픈 편지를 대신 읽기도 했다.
바닷속에 잠들었던 이들의 죽음을 처음 뭍으로 끌어낸 건 지역 고교 교사이자 향토사학자였던 일본인 야마구치 다케노부(2015년 사망)였다. 그는 현지에 남은 각종 사료와 자료를 확인해 1976년 ‘우베지방사 연구’(제5호)라는 지역 학술지에 ‘탄광의 물비상-쇼와 17년(1942년)의 조세이 탄광 재해에 관한 노트’라는 논문을 내어 조세이 탄광에서 일어난 대규모 참사를 알렸다. 이어 1990년 조세이 탄광 ‘집단도항명부’가 발견돼 희생자 신원을 확인할 단서가 발견됐다. 이듬해 야마구치를 대표로 지역에 뜻있는 시민들이 ‘새기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수소문 끝에 한국의 유가족들과 연락이 닿았고, 1992년 한국 유족회가 생겼다. 유족 강일호씨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조사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곧 모시고 갈 것”이라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희생된 일본인 47명의 유족 일부도 이날 추도식에 참석해 “차가운 물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번 발굴 작업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에 한·일 시민 1212명이 857만6천엔(약 7830만원)의 돈을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새기는 모임’은 갱구 입구가 열린 만큼 지체없이 희생자 유골 수색 작업에 계획이다. 오는 29일 피야를 통해 잠수부를 투입하고, 30일에는 갱구 입구에서 터널 내부로 진입이 예정돼 있다.
2차 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이들 유골 발굴 작업을 해온 일본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 대표는 추도식에 참여해 “‘안정 동위원소 분석법’이란 걸 이용하면 뼈 한 조각만 있어도 고인의 출생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며 “유족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들을 고향에 돌려보낼 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새기는 모임’과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진상 규명과 적절한 사과, 보상 요구도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해 일본 정부는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해 수습과 관련해 “매몰 위치와 깊이 등이 분명하지 않아 유골 발굴을 실시가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새기는 모임’ 쪽은 “전쟁 물자인 석탄을 캐기 위해 희생된 이들은 전몰자로 봐야 하고, 유골이 실재하면 정부가 책임감 있게 조처해줬으면 한다”는 입장이다. 갱도 입구가 발견돼 상황이 달라졌고, 유해가 확인되면 일본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추도식에 참석한 양현 조세이탄광희생자 대한민국유족회 회장은 “조만간 희생자들의 유해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한·일 정부가 국가나 이념의 경계를 넘어 책임감 있는 역할을 해주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말했다.
<2024.10.27 한겨래신문 홍석재 특파원 글과 사진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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