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신분 以堂 宋成彬 (사)대전문화유산울림 부설 문화유산학교장
우리는 궁궐이나 불교사원, 혹은 서원과 같은 곳을 답사했을 때, 그 곳의 여러 건물들 정면에서 건물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건물 이름의 맨 뒤에는 반드시 ○○전, ○○당, ○○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전(殿) 당(堂) 각(閣)이란 명칭은 당사자가 붙이는지 어떤 규정 하에서 붙이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규범상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답사여행 시에 받곤 합니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고건축을 감상할 때에 편액(扁額)을 보는 법을 생각해 봅니다. 고건축에는 건물의 이름 맨 끝에 전,당,합,각,재,헌,루,정(殿 堂 閤 閣 齋 軒 樓 亭)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그것은 건물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즉 건물에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계를 나타내는 신분이 있습니다. 건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건물 이름에 붙는 끝 글자에도 서열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전(殿)은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왕이나 왕에 준하는 자리입니다. 이를테면 왕의 자리 근정전, 부처의 자리 대웅전 극락전, 공자의 자리 대성전, 예수의 자리 성전 따위가 그것입니다. 궁궐에서 전(殿)은 왕이나 왕비, 혹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쓰는 건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어울리도록 자연히 건물의 규모도 크고 품위 있는 치장을 갖추었습니다. 가끔 사극에 보면 왕이 있는 곳에 강녕전, 왕비가 있는 곳에 교태전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나 왕비의 전(殿)이라도 일상적인 기거 활동 공간인 경우보다는 의식 행사나 공적인 활동을 하는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교사원인 경우는 제일 높으신 분이 부처이므로 이 분을 모신 곳에 전(殿)이 붙습니다. 대웅전(大雄殿) 극락전(極樂殿)이 한 예입니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건물에 전(殿)字가 붙었다면 이상하겠지요? 유교의 성균관이나 향교에는 공자를 모시는 곳에 전(殿)字가 붙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모시는 자리는 성전(聖殿)이라고 하지요. 전(殿)은 의식행사를 하는 집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堂)은 전(殿)보다 한 단계 낮은 건물입니다. 궁궐에서는 공적인 활동보다는 조금 더 일상적인 활동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당(堂)은 왕이나 왕비, 그 이하 세자나 궁궐 안 관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왕과 왕비는 전(殿)과 당(堂)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창덕궁 희정당 연경당, 덕수궁 석어당) 창덕궁 희정당이 임금이 집무를 보는 곳이 듯이, 당은 대개 일하는 공간 즉 집무를 보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하 사람들은 영의정이라도 전(殿)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가(私家)에서는 제일 높은 것이 堂입니다.(송촌 쌍청당 동춘당 제월당, 안동 충효당) 불교 사원에서는 스님들이 사용하는 곳이나 큰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에 당(堂)이라 하며(부석사 조사당)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건물에 당(堂)이라는 명칭이 붙습니다(성균관과 향교의 명륜당, 병산서원 입교당, 연산 돈암서원 응도당)
다음 단계의 건물이 합(閤)이나 각(閣)인데, 대개는 전(殿)이나 당(堂) 부근에서 그것을 보조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합(閤)은 현재는 없어졌지만 경복궁에 곤녕합, 제수합이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복원중) 임금의 휴식공간으로 보면 됩니다.
각(閣)은 알림의 공간으로 보면 됩니다.
보신각(普信閣), 범종각(梵鐘閣), 효자각(孝子閣), 열녀각(烈女閣), 규장각(奎章閣) 등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건물입니다. 자연히 규모 면에서도 전(殿), 당(堂)보다는 떨어집니다.(창덕궁 정향각, 대전 옥류각, 서원의 장판각, 사원의 칠성각 삼성각)
재(齋)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 즉 살림집이거나 혹은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는 건물입니다.
궁궐에서는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기거하는 활동공간이며(경복궁 집옥재,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 성균관이나 서원 향교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공간, 일종의 기숙사입니다.(흥암서원 집의재 의인재, 회덕향교 동재 서재, 송촌의 오숙재 호연재 옥오재)
헌(軒)은 대청마루나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일상적 주거용보다는 상대적으로 공무적 기능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경복궁 원길헌, 덕수궁 수옥헌 정관헌, 창덕궁 석복헌, 대전 송촌 소대헌, 강릉 오죽헌) 대개 지방 관공서 건물이 되겠습니다.(동헌)
루(樓)는 바닥이 지면에서 사람 한 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즉 회의 공간, 손님 접대 공간이 되겠습니다.
주요 건물의 일부로서 누마루 방 형태로 되어 있거나 큰 정자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주합루, 부석사 안양루, 돈암서원 산앙루, 병산서원 만대루, 선암사 강선루) 간혹 이층으로 된 건물이 있는데 이럴 때는 반드시 일층과 이층의 이름을 따로 붙여서 일층은 ○○閣, 이층은 ○○樓가 됩니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라는 말과 같이 루(樓)와 각(閣)은 따라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정(亭)으로, 흔히 정자(亭子)라는 것으로 휴식과 사색의 공간입니다. 연못가나 개울가, 또는 산 속 경관이 좋은 곳에 휴식이나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집을 말합니다.(경복궁 향원정, 창덕궁 애련정 부용정, 담양 면앙정 식영정, 보만정) 정이 붙는 경우는 산수가 좋은 곳에 건물이 하나일 경우이고, 건물이 2층인 경우는 2층을 가리켜 루, 1층은 각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창덕궁 뒤에 규장각이 2층 건물인데 1층에는 규장각, 2층은 주합루라는 편액이 붙어있습니다. 서울의 종로에 보신각이 있습니다. 지금은 보신각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잘못된 경우에 해당합니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2층은 종루, 1층은 보신각으로 붙였습니다. 시정해야 될 점으로 생각합니다.
건물 명칭의 서열 즉 신분을 정리하면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 됩니다.
이와 같이 건물도 위계질서 즉 신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규모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공식 행사용에서 일상 주거용을 거쳐 다시 특별 행사용, 그리고 휴식 공간용으로 순서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늘 쓰는 학문의 전당에서의 전당, 전각아래, 누각아래 등은 이런 집의 형태를 보고 한 말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편액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럴 경우에는 기단(基壇:집의 터전이 되는 단)이 몇 단이냐 하는 기단의 높이와 기둥모양을 보고 구분합니다. 궁궐의 월대가 기단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예외도 있지만(동춘당의 경우 기단이 1단임) 기단이 높으면 그 건물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줍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의 경우 기단이 7단입니다. 또한 전과 관아의 청사에는 원주(둥근 기둥)를 쓰고, 일반 건물에는 방주(네모난 기둥)를 씁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은 아는 만큼 보입니다.
<이 글은 덕수궁 궁궐지킴이 박복희 선생의 조언을 참고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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