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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석(望柱石)과 세호(細虎)에 관한 이야기

돌까마귀 2022. 7. 15. 08:29

인릉(순조)의 망주석 세호

 

정릉(중종)의 망주석 세호

 

선릉(성종)의 망주석 세호

 



세호(細虎)란 가늘게 조각한 호랑이 문양을 말합니다.


세호는 고대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기린, 용, 이무기, 해태 등이 있는데 이들은 덩치가 큰 동물인데 반해 덩치가 작은 상상의 동물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호입니다. 더하여 천록, 산예 등도 있는데 모두 나쁜 액운을 막아주고 잡귀를 쫓는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이 세호를 망주석에 조각하여 새겨 넣는다 함은 분명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가 클 것입니다. 망주석이란 글자 그대로 (望柱石; 바라보는 돌기둥)이라 하겠습니다. 즉 무덤을 바라보며 지키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마실 나갔던 귀신이 멀리서도 이 망주석을 보고 자신의 무덤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어불성설입니다. 망주석을 세우지 않은 무덤의 귀신들은 맨 날 길을 잃고 헤매다 고아가 돼버릴 것입니다. 여기에서 멀리서도 불빛을 보고 찾아오는 것은 장명등입니다. 묘의 중앙 앞에 세우는 장명등에는 원래 불을 밝히는 곳입니다. 또 어떤 이는 생김새의 모양이 남근과 같이 생겼다하여 자손 번창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세워도 될 일이지 두 개씩이나 세울 까닭이 없을 듯하여 왠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망주석은 음양의 조화와 풍수상의 사신사(四神砂)에 해당하는 장치물로서 수구막이의 역할을 합니다. 망주석을 세우는 위치에 대하여는 왕릉이나 사대부가의 곡장이 있는 무덤을 살펴보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봉분 앞 상석과 곡장의 끝부분 사이에 터져있는 공간에 망주석을 세웁니다. 이른바 광중(혈자리)에 맺힌 생기를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막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망주석의 구조와 세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은 팔각형으로 주역의 사방팔방을 의미하며, 그 팔면 중 세호가 붙어 있는 한 면이 상석을 향해 있습니다. 소위 망주석과 상석을 연결하는 선을 그어 경계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상석의 좌우측 곡장의 끝부분 사이에 세워 상석 쪽으로 세호를 붙여 놓았는데, 이는 광중으로 통하는 석실의 문을 바라보며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바라보는 돌기둥(망주석)이라 명명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 광중으로 통하는 석실 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상석 아래에 있습니다. 상석 아래에는 고석4(혹 5개도 있음)개가 받혀져 있고, 그 아래에 넓고 평평한 3개의 받침돌이 있는데 바로 받침대 아래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습니다. 하여 망주석의 세호가 이 문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논란(異見)이 많은 것이 바로 이 세호의 방향입니다. 소위 좌상우하니 우상좌하니, 좌상우상이니 좌하우하니 하며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고도 분명한 것은 좌상우하(左上右下), 즉 동상서하(東上西下)입니다. 이는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에 따른 음양의 이치입니다. 좌측(동쪽)은 陽이니 하늘의 기운(天氣)을 받음이요, 우측(서쪽)은 陰이니 땅의 기운(地氣)을 받음으로서 무덤 속의 광중(혈자리)이 가장 편안한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와 꼬리, 앞다리와 뒷다리의 생김새가 있어서 그 방향이 분명해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풍수학에 가장 조예가 깊은 이들을 꼽는다면 역시 조선을 창업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무학대사와 정도전, 하륜 등이 있으며, 정조 선황제와 세조 대왕 역시 당대 최고의 풍수 사상을 익히신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정조 선황제께서 직접 집필하신 <홍재전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지금의 화성 융릉으로 천장하면서 소요 설치된 모든 석물들의 규격과 모양, 조각과 제 설명을 덧붙여 놓은 귀한 자료를 발췌하여 옮겨봅니다.


○望柱石。臺上高七尺五寸。上耑作圓首。次雕連柱。次作八面雲頭。自雲頭至臺。皆八面。次一尺一寸。作廉隅。次四尺五寸。作柱。各
  面內面雕細虎。左柱陞。右柱降。下耑五寸。植於臺石。臺石高二尺。上層高一尺。雕荷花。次五寸。作細腰。各面雕連環同心結。下層
  高一尺。雕牡丹。次爲臺一尺三寸。入地一尺。鶯峯石。
 
망주석(望柱石)은 대(臺) 위의 높이가 7자 5치이고, 상단에는 둥근 머리를 만들었다. 다음에는 연주(連柱)를 조각하였으며, 다음은 8면의 운두(雲頭)를 만들고, 운두로부터 대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8면이다. 다음은 1자 1치인데 모서리를 만들고, 다음은 4자 5치인데 기둥을 만들었다. 각 면의 내면에는 가느다란 호랑이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 하단의 5치는 대석에 심었다. 대석의 높이는 2자이다. 위층의 높이는 1자인데 연꽃을 조각하였고, 다음의 5치는 가는 허리를 만들었으며 각 면마다 연환동심결(連環同心結)을 조각하였다. 아래층의 높이는 1자인데 모란을 조각하였고, 다음은 대석 1자 3치인데 1자는 땅에 들어갔다. 
 
현재 사대부나 일반 무덤의 경우 세호 방향이 서로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마도 늘 논란의 소지가 있는 '좌상우하'라는 방위 개념을 잘못 적용하여 생겨난 오류인 듯합니다. 귀신의 절대 방위를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여 인간의 입장에서 방위를 정하다 보니 석물을 설치하는 인부의 판단과 이를 감독하는 종중 책임자의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원인과는 달리 정치적인 해석(사색 당파 싸움) 또는 학풍 싸움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왕릉이나 왕비릉, 후궁 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건릉(정조 릉)의 경우도 아마 정치적인 힘이 개입된 듯합니다. 당시 노론 벽파의 권력이 임금을 죽이고 바꿀 정도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정조이기에 아마도 그리하였던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당파의 힘의 논리에 따라서 그 방향을 달리하였습니다.


또 왕비나 후궁의 경우 외척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풍수적인 조치로서 세호의 방향을 반대로 설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흩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음양의 기를 흩트리는 것은 그 무덤 속 귀신의 기를 빼버리고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는 방책에서 그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책을 풍수비보라 합니다. 또 풍수 지리적 입장에서 그 지역의 기운을 바꾸기 위하여 방향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아래 조상의 서열이 바뀌는 역장도 이와 같은 비보풍수의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세호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그 모양이 바뀌어 왔습니다. 대체로 망주석이 처음 도입되던 조선 초기에는 세호 모양이 땅콩모양이거나 귀 모양으로 중간에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이후로 직사각 장방형의 모양과 거북등 껍질 같은 모양과 구름 문양처럼 바뀌다가 조선중기에 들어서서 호랑이 문양 같은 산예의 문양이 뚜렷이 조각되게 됩니다. 이때의 조각 기술은 섬세하고 화려하여 그 아름다움이 환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예술적인 조각품으로 변천되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통통하고 아담스런 세호가 가늘고 길쭉해지더니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다람쥐로 바뀌었습니다. 거기다가 요즘은 다람쥐 머리(입) 앞에 밤송이까지 조각하였는데, 이를 두고 혹자들은 무덤 속 영혼이 배고프지 말라고 먹을 양식을 돌에다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전혀 근거 없는 말들을 그럴싸하게 지어낸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유통되고 있는 다람쥐 모양을 한 망주석들이 다른 석물들과 함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제품들이라서 좀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신성시해야 될 조상의 무덤 앞에 중국산을 놓아야 하는 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