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이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9년(서기 487년)에 역참(驛站)제도를 도입하여, 나라의 땅과 길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장승(후, 堠)을 만들어 5리 또는 10리마다, 촘촘하게 나라(官)에서 세우고, 현재의 위치, 이웃마을의 이름과 거리, 방향 등을 꼼꼼하게 표현하여, 관로(官路/國道)의 가장자리에 세워서, 길의 정보를 알려주었든 기능을 가진, 나라에서 관리 한 푯말(里程標)을 장승이라 하였고,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배기' 또는 '장승백이'라 불렀다. 5리(里)와10리에는 작은장승을, 30리에는 큰장승을 세웠고, 장승에게 지내는 제사의식은 없었다. 장승은 길을 알려주는 단순 기능의 '이정표'이고, '푯말'이였기 때문이다. 장승에는 길을 따라 대륙(中國)에서 들어올수 있는 전염병과 잡스러운 귀신들을 막아 내기위하여, 무서운 장군의 얼굴이나 용(龍)또는 치우천왕의 표정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여 세웠다.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에는, 1890년 무렵 인천시 만수동 별리고개 '장승배기'에서 몰래 뽑아 가져 간, 큰 장승이 전시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장승중에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명품 장승이라 할수 있다. 가슴에 쓰인 명문(銘文)에는 "이곳은 '인천의 관문'에서 10리 못 미쳐에 있는 '성현마을'이고, 서쪽으로 20리에는 '제물포'가 있으며, 동북쪽으로 60리에는 '서울'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민속박물관"에는, 1890년 지금의 북한 땅 김화(金城縣)지역의 '장승배기'에서 수집하여 가져 간 작은장승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슴에는 "이곳은 '서북마을'이고 '금성현'까지는 30리가 남아 있다".라고 쓰여 있다. 아래쪽의 글씨가 없는 부분이 잘려져 있어 아쉬움이 크다.
조선시대의 판소리, 변강쇠타령의 노랫말에는, "변강쇠가 경상도 함양땅 동구 밖, 마천고을가는 큰 길가의 장승을 땔감으로 뽑아 불 태웠다가, 전국 8도 장승들의 앙갚음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 여기서 노래하는 그 장승이 바로 그 長栍이다. 만약 변강쇠가 뽑아 불태운 것이 장승이 아니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벅수'였다면, 변간쇠타령의 노랫말은 "전국 8도 장승들의 앙갚음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가 아니라 "마을 원로들의 지시를 받은 마을 청년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바뀌었을 것이다.
또 다른 판소리 박타령(흥부가 興夫歌)의 노랫말에는 "넓은 들녘에 늘어서 있는 詔(粟)(5곡에 속하는 조)를 보면, 대촌고을어귀의 당산(堂山)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법슈'가 연상된다".라는 내용으로, '법슈'는 벅수의 옛 말이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을 뜻하는 판소리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벅수(法首)와의 차이점을 확실하게 구별할수 있다.
조선시대, 일십당 이맥(李陌)이 목숨을 걸고 쓴 상고(上古)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白逸史 1520)"의 내용에는, "우리의 조상 인 '단군왕검'이 곧 '선인법수(仙人法首)다."라고 기록 하였으며, "하늘 아래의 다섯 방향(동서남북과 중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天下大將軍'이라 하고, 지하의 다섯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地下大將軍'이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즉 법수 뜻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태백일사'의 내용들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라고 하여,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350여년을 숨어 지냈으나, 1800년대 후반에 밀려 온 개화기에 이맥의 후손, 해학 이기(李沂)에 의해, 제자들에게 공개 되어 알려 졌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라는 명문도 이 즈음부터 여러 마을의 서낭당과 당산(堂山)의 벅수로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그러다가, 한말 대한제국 개화기 시절 우편제도(郵遞司)의 도입(1884)으로, '역참(驛站)제도'는 폐지(1895)되고,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도 우리땅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없어 졌다. 그래도 '장승'이 세워져 있었든 곳, 즉 장승배기는 터(址)만 남아, 현재 1200여곳이 조사되어 보존되고 있다.
우리 땅에서 '장승'이 완벽하게 소멸되고, 15년이 지난 후에 '일제강점기'는 시작되었고,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은 "조선민족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민속신앙의 뿌리>라고 할수 있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역할의 벅수(法首)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을 "망령된 신앙(미신 迷信)"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깍아내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15년전에 우리땅에서 완벽하게 소멸하여 흔적도 없는, '장승'으로 분류, 합치하고 '벅수'를 '장승'으로 부르고, 쓰도록 강요하고, 교육하였다.(1933,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 확정 발표).
또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고려시대'때, 사찰(寺剎)에서 운영하였던 서민들의 '돈놀이조직'(私債놀이)인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는 '장생표주(長栍標柱)가 장승의 근원이라는, 뚱딴지 같은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우리의 학자들은 한마디 반론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떼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도, 그들이 쓴 책자와 논문에 쓰여있는 '장생고' 즉 사체업(私債業)과 '장생표주'(절집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뚝 長栍標柱)를 '장승'의 유래(元祖)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심한 노릇이다.
근본 원인은, 일본에서 공부 한, 우리의 선배 학자들이, 왜곡되고 변질된 일본의 '책'과 '논문'을 '반박'하거나, '논설'도 없이 그대로 베껴서 옮겨 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에 유학을 한 우리의 학자들은, 일본 교수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배웠고, 그들이 또 '제자'들을 키워, 해방된지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른바 '민속학자'라는 그들은, 우리의 수호신'벅수'를 '장승'이라 부르며, 부끄러움도 없이 꾸준하게 책을 쓰고, 논문도 발표하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백과사전,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조차, 모두 '장승'으로 부르며 '일제강점기'의 '찌꺼기'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만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 장승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9339June황준구의 글을 참고, 발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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