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까마귀(石烏) 창작글 모음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내며

돌까마귀 2022. 7. 27. 17:27

그가 내가슴깊이 들어와 앉은 때는 1968년 이었다.

YS와 부딛힌 원내총무 대결에서 한창 민감한 청소년기의 고등학생 눈에는 그는 바로 영웅이었다.

71년 대통령 선거유세때 대구 수성천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청중들은

마을마다 버스로 모아온 공화당의 동원 청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40대 기수 김대중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었다.

 

그래서 야당도시 대구와 경북에서 그는 51%의 득표를 얻었지만 타지역에서의 득표 탓인지

아니면 부정개표 탓인지, 51대 49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었다,

 

동해의 물귀신이 될 뻔 했던 그가 되살아 나왔을 때, 끓는 피 두주먹을 불끈 쥐었었고,

스물을 넘은 내 가슴깊이 휘몰아친 유신독재는 문세광이 저질렀다는 영부인의 시해사건 마저 나를 못믿게 하였지만,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허언에서 남이 보면 않될, 싸한 웃음도 숨기며 즐겼었었다.

 

그리하여 제4공화국이라 불린 '유신시대'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라 불린 1980년이 밝았지만

신군부의 쿠데타로 처참하게 뒤집히고, 무기력한 동교동과 상도동은 신군부의 군화발 아래 '광주사태'와 '내란음모죄'에 의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래도 저승사자의 외면 덕인지 아니면 님의 복인지 모르지만 미국행 망명길에 올라 우리를 한숨 돌리게 하였었고, 되돌아온 고국땅 담장안 연금속에서 태어난 "민주화추진협의회" 이 얼마나 찬란한 이름이었던가.

 

김대중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망명과 단식'으로 이루어 낸 찬란한 그 이름에 우리들은 기대를 걸고 몰려들었었다.

대전 옥계동 성당에서 님 옷깃에 손대어 볼려고 비표를 마련하고, 하얀 편지봉투 속 채워 장만하여,

밀리는 신자님들 헤치고, 눈 시뻘건 기무사요원을 피해, 님의 양복주머니에 봉투를 밀어 넣으며 나는 빌었었다.

"하늘이시여! 님의 가시는 길 편하게 하시고, 사심없이 대중의 뜻대로 '형님먼저 아우먼저' 군부독재 끝내게 하소서"라고

 

6,10항쟁의 최루탄속에서도, 백골부대의 살벌한 진압봉속에서도 외치던 군부독재타도와 민주화는

'물태우'의 6,29 항복선언으로 이루어 지는듯 하였는데, 두 님의 가슴속엔 "내가먼저"가 숨어 있어,

전 국민의 염원과 '초선의원 7인'의 연세대 정문앞 야권후보 단일화 촉구 삭발시위도 소용없이

통일민주당 전당대회는 용팔이 각목부대가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알량한 장세동의 *50억 창단자금*에 눈과 귀가 어두워져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대선후보에 오르시니

그때가 바로 1987년 11월 12일 일레라

 

그날 새벽 전국 각지의 우리 민추협 하부구조 동지들의 탄식을 그는 아니 당신은 아시는가?

후보 단일화를 목매어 외치든 방방곡곡의 외침을 나몰라 하며 창당을 하고 대선후보에 오르고

영호남의 골을 가래질하며 내달린 대선이 경상도표 나눠 먹은 물태우 김영삼에 이은 3등이였었지

5년 뒤에 이어진 대선도 '3당야합'으로 놓쳐 버리고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영국으로 떠날 때 까지는

연민의 정이 남아있었는데, 5.16 군사쿠테타의 심장 JP와 연합하여 정권을 잡은 뒤, 우리 동지들은 숨죽여 지났노라

10년 전 그날, 평화민주당 창당 날 새벽' 전국에서 원혼으로 승화한 17명의 후보단일촉구 민추협동지들을 생각하면서...

 

님이시여 이왕에 가신 길, 그곳에 닿으시면

그날의 영령앞에 그대 당신은 무릎 꿇으시라

그리고 용서를 빌으시라

한사람의 욕심이 지역의 골을 얼마나 깊게 팠던가를 참회하면서...

 

가시는 길 편안하게 보내주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왔던 원망의 소리를 해야하는 이내 마음도 용서하시고...

 

2009. 8. 18.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듣고

 

*국회 속기록(박찬종의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