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온 글, 토론, 강의, 역사와 전통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이야기

돌까마귀 2021. 7. 18. 12:30

 

1950년대 후반 코흘리게 국민학생 시절 형들과 함께 '한국전쟁 낙동강방어선'의 최전방 고지였던 작오산(鵲烏山) 자락을 누비며 주워온 탄피(彈皮)나 탄띠를 엿장수에게 엿으로 바꿔 먹다가, 차차 돈에 눈을 떠 이동고물상인 리어카 엿장수와 현금거래를 하면 빨간 1園('원'으로 읽지 않고 '환'으로 읽음)짜리 몇장을 받아 챙겨 놓았다가 학교를 파하고 바로 읍내의 만화방으로 달려가 눈깔사탕보다 더 단단한 돌사탕을 입에 물고 만화책에 빠져들던 시절이 있었다.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1959년에 탄생한 '김산호(필명 산호)'의 시리즈 만화. 한국의 토종 슈퍼히어로물. 59년 당시로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장르로 발간되어 대박을 쳤던 한국 최초의 SF시리즈물 이기도 하고, 한국 최초의 슈퍼히어로 만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 이 작품을 그릴 때 만화작가의 나이가 만 19살이라는 점도 파격적인 요소였다.

 

줄거리

무대는 서기 2110년. 한국에서 어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라이파이'는 부모님이 피살당하고 버려진 채 우주과학자 김철호 박사에게 발견되어 김박사의 아들처럼 키워지는데, 어느 날 국제 깽단인 Z단의 습격으로 김박사는 살해당하고 연구하던 비밀 설계도를 뺏기게 된다. 이에 라이파이와 김박사의 딸 제비양은 스스로 히어로가 되어 세계평화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김박사가 태백산 깊숙한 곳에 건설해놓은 요새에서 비행기 '제비호'를 만들고 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날아가 악당들을 물리쳐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총 4부작 시리즈로 발간되었는데 'Z단' 뿐 아니라 다른 범죄집단인 '해골단', '피너3세', 잉카문명의 후예로 잉카의 재건을 꿈꾸는 '녹의 여왕', 당대 만화답게 등장하는 악의 공산당 '붉은 제국' 등 여러 악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얽힌 이야기

내용면에서는 당시의 명랑만화나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만화들과는 다르게 'DC코믹스' '마블코믹스' 스타일의 미국식으로 그려젔는데, 초능력 같은 것도 없고 특수장비인 제비봉과 무술만으로 적들을 제압한다는 점에서는 '배트맨'과 흡사한 부분이 많은데, 실제로 내용중에 배트맨이 까메오로 잠깐 나오기도 하니 아마 작가가 배트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당시 6.25이후로 못살던 후진국 한국에서 이런 만화가 나온 것은 참 대단했다. 무엇보다 라이파이의 두건에는 'R'이나 'L'이 아닌 'ㄹ'라는 한글이 쓰여져서 한국인이라는 걸 어필하고 있다. 못살던 한국에서 당시에는 첨단 무기가 나오고 지구를 정복한 악당들을 제압한다는 것에 아이들은 환호했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이라는 말과 제비호의 붉은 별 때문에 북한의 인공기와 엮여 작가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고초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 때문인지 작가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국에서 '찰튼코믹스' 소속 만화가로 활동했지만 다른 작품으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름이 '제비호'인 잠수함 관광산업을 하여 어느 정도 사업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다가 90년대 초 '대쥬신제국사'로 국내에 복귀하였는데 고령의 노선배가 녹슬지 않은 그림 솜씨를 보여주어 만화계에선 높이 평가를 했으나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그림 이외 내용까지 추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쥬신제국사

김산호가 1989년에 전3권으로 간행한 '환빠(사이비유사역사학자)소설'이자 '불쏘시게(질이 떨어지는 서적)소설' 작가 스스로 1988년부터 역사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니 연구는커녕, 갑작스럽게 '환단고기의 환독'에 빠져 1년만에 출간한 작품. 만화책 수십 권 분량을 모두 일러스트 수준에 가까운 컬러 그림으로 그렸으며 1994년 동아출판사를 통해 '올 컬러 양장본' 5권으로 다시 냈는데, 종이 자체도 어지간하면 찢어지지 않는 최고급 코팅지인데다가, 별로 얇지도 않고 크기는 엄청 큰 책 안의 모든 삽화, 만화를 모두 '올 컬러 총천연색 인쇄'를 하였으니, 당시 값이 권당 4만원에 이르던 고가였다. 

게임챔프 1994년 5월호에 소개된 '대쥬신제국사'. 이때만 해도 환단고기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던 시절이라 이렇게 새로운 역사적인 저서라고 홍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