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온 글, 토론, 강의, 역사와 전통

대국민 사기극의 끝판왕 '평화의 댐' 이야기

돌까마귀 2021. 5. 7. 09:02

"지금이다. 둑을 터라."

퇴각하는 수나라 병사들이 얕은 살수에 들어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을지문덕 장군은 결연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살수 상류에 만들어 놓은 둑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둑을 텄다. 거세게 밀려온 강물은 수나라 군을 삼켜버렸고 30만 대군 중 2700여 명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수공(水攻)으로 유명한 612년 살수대첩 이야기다.

 

이로부터 1374년이 지난 1986년 10월, 전두환 정부는 '또 다른 둑'을 쌓았다. 당시 전두환은 7년 임기가 끝나가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대표단이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는 반민주적인 선거제도에 의해 자신의 친구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전두환의 계획에 반해, 대통령을 국민 스스로 뽑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도록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가 강력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10월 28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반독재민주화, 반외세자주화, 통일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가 이를 막으려는 경찰에 밀려 학내 주요 건물에서 장기투쟁에 들어갔다.

이 같은 투쟁이 3일째 들어선 30일 전두환 정권은 느닷없이 북한이 강원도 화천 북쪽에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북한이 금강산에 있는 댐을 무너뜨리면 200억 톤의 물이 밀려와 화천 이남 5개의 댐이 다 부서지고 서울 북부 경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여의도 63빌딩 중간까지 물이 차올라 서울이 모두 침수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1300여 년 만에 '을지문덕의 수공'이 되살아난 것이다.

보수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많은 국민들은 북한의 수공 공포에 휩싸였다. 국민들이 수공 공포에 빠져 다른 것에 신경을 쓰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다음 날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여 학교에 갇혀 있던 1288명을 체포, 구속했다. 단일사건으로 '최대의 구속 사태'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 같은 수공 마케팅을 통해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1987년 2월 강원도 화천 골짜기에 북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 건설에 들어갔다.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한 '평화의 댐'이 바로 이것이다. 이 댐은 1988년 5월에 완공됐다. 건설비용을 모으기 위해 중‧고등학교의 경우 강제적으로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를 다녔던 한 제자는 "담임선생님은 집이 가난해 성금을 내지 못한 학생을 앞으로 불려내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고 개 패듯이 팼다"고 분노했다.

                                                                                 청남대에 있는 전두환 동상

 

전두환은 건대 항쟁 등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북한이 금강산 댐을 터트려 수공을 벌일지 모른다고 공포 마케팅을 해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

이 댐은 결국 문제가 되고 만다. 군사독재 세력과의 3당 합당에 의해 대통령이 됐지만, 원래 민주화운동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취임해 이에 대한 감사원 특별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북한의 수공 위협을 크게 부풀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북한 금강산댐의 최대 저수량은 59억 톤 남짓이고, 평상시는 이의 절반 이하인 27억 톤 규모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마디로, 금강산댐 저수량을 실제보다 4배가량 뻥을 쳐 국민들을 수공 공포에 빠지도록 사기를 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기에 성금을 내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가난했던 많은 학생들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처를 받고 부모를 원망해야 했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춘천에서 화천을 거쳐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은 이제 도로정비를 해서 길 자체는 훌륭하다. 그러나 길이 험하기가 이를 데 없다. 춘천에서 화천까지는 53킬로미터이지만 차를 몰고 가더라도 1시간 반이 걸린다. 특히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까지의 20킬로미터는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로 한참을 지그재그로 달리다보면 건강한 사람도 멀미를 느낄 정도다. 거리는 20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45분이나 걸리니 시속 30킬로를 내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터널을 빠져 나오면 탁 트인, 댐 위를 달리는 직선도로가 나타나고 그 끝에 '평화의 댐'이라는 큰 글씨가 산위에 쓰여 있다. 댐을 건너가자 오른쪽에 큰 돌에도 '평화의 댐'이라고 써 놓았다. 이 돌에 새겨진 글씨를 갈아내고 '사기의 댐'이라고 써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습한다. 툭하면 부하들을 끌고 다니며 골프 등 호화 생활을 즐기면서도 "전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 전두환이니, 59억 톤을 200억 톤으로 사기 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이 댐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라도 정치인들이 갖가지 공포 마케팅을 통해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수공뿐이랴! '핵미사일 공포', 우리가 난민을 받으면 세계 각 지역의 난민들이 몰려와 우리나라가 난민들로 골머리를 알게 될 것이라는 '난민 공포',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코로나19 주범인 중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하지 않아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 만연했다는 '코로나19 중국인 공포' 등을 정치인들이 조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들이 조장할 공포들은 끝이 없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을 대비한 댐이기 때문에 다른 댐들과 달리 저수시설이나 발전시설이 없다고 한다. 댐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다가 이곳에 설치해 놓은 댐의 연혁 설명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 북한의 금강산댐(임남댐)은 2000년부터 담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한강으로 유입되는 물이 9.5%인 17억 톤이 줄어들어 서울 지역 물 부족 현상이 심화됐고 전력생산량이 줄었다는 것이다. 금강산댐 때문에 수공이 아니라 물 부족을 걱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인공위성 사진 검토 결과 평소의 50배가 넘는 물이 평화의 댐에 유입되어 이를 확인해보니, 북한이 임남댐 보수를 위해 가두어 뒀던 물을 방류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댐의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는 이에 대해 북한과 논의했으나 제대로 된 결론을 내지 못했고, 이에 금강산댐이 결함으로 붕괴되는 경우에 대비해 평화의 댐은 2단계 공사에 들어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 최종 준공됐다고 한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모두들 좋아하는 가곡 '비목'의 가사다. 비석 비(碑)에 나무 목(木), 즉 나무로 만든 묘비를 의미하는 '비목'이란 제목이 무언가 비장한 느낌을 주지만, 그 가사는 아주 추상적이라 그 속에 숨겨진, 가슴 아리게 슬픈 사연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중반 한명희라는 청년 장교가 평화의 댐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다. 하루는 잡초가 무성한 곳에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한 무명용사의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하고 그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한 청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사를 지었고, 이 가사에 친구인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비목이다.

 

평화의 댐에 가면 덤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비목을 기념해 조성한 비목공원이다. 평화의 댐 왼쪽 끝으로 가면 비목공원이라는 표시판과 밑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난다. 이 길로 다 내려간 뒤 알게 된 것이지만, 평화의 댐에서 차를 타고 아래쪽으로 가면 비목공원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이 있는데 이 길을 추천한다.

 

아니 비목공원에 콘크리트 조각이라니!

계단으로 내려가니 비목의 사연과 함께 콘크리트로 만든 커다란 조각이 나를 맞았다.

조각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투덜대며 내려가니, 오른쪽에 큰 돌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돌무더기에는 낡은 군모와 나무로 만든 비목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비목이지! 비목을 바라다보고 있자, 한명희 씨가 가곡을 통해 그린, 분단과 전쟁 속에 쓰러져간 꿈 많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들에게 묵념을 한 뒤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화천을 떠났다. 화천의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떠나는 내 등 뒤로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님의 글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