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제 : 2024년 10월 30일
어디서 : 대전 동구 길치고개를 넘나들던 옛길을 더듬으며
누구와 : 한밭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는 사람들과 함께
비룡삼거리
대청호수로
줄골 돌장승
비룡동 줄골, 아들 낳기를 바라며 두손모아 빌었던 성혈(性穴)바위 / 왼쪽에 연자방아 밑돌이 보인다.
갈고개길
대청호수로 비룡교 / 갈고개를 넘어 용운동으로 가는길
비름골, 열녀 안평이씨 정려각
비름골, 송석당 성혈(性穴)바위
저 멀리 흐미한 왼쪽 백골산성과 가운데 식장산
비름골, 하늘에 제를 올렸던 별자리 바위구멍(星穴)
저멀리 식장산, 오른쪽 끝은 신선바위
비룡동 덤벅골, 왼쪽 위로 대전둘레산길 5구간의 '능성'
비룡동 길치들, 저멀리 좌중간 신선바위와 중앙 갈현성, 우측은 능성
이곳에서 실개천을 건너 오른쪽으로 좁은 밭둑길로 들어서면 신상로,
옛 경부고속도로에 올라서며 내려다 본 길치들, 저멀리 흐미한 식장산, 오른쪽에 신선바위와 갈현성
신상로로 이름이 바뀐 옛 경부고속도로 길치터널 하행선 출구에서
상행선 입구로 올라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대전 동구 주산동 272, 거북바위가 있는 '쉴만한 물가'로 이름 지어진 곳이다.
옛 사람들이 오르내렸을 길치고개길을 내려가며 대청호 수몰민이 이주하여 사는 '주산동 상촌/ A지구'를 당겨보고
주산동 고용골로 내려가는데 옛날에는 소와 말이 끈 수레가 넘었을 넓은 길은 잡초와 넝쿨이 발목을 잡는다.
고용골 바위구멍(性穴)을 찾아보니 풍화작용으로 많이 닳았고 '마당쇠'님은 횡재를 하셨는데
추파 송기수를 모신 상곡사(象谷祠)를 둘러보고
송기수(宋麒壽)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태수(台叟), 호는 추파(秋坡)·눌옹(訥翁). 송순년(宋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원헌납 송여해(宋汝諧)이고, 아버지는 군수 송세충(宋世忠)이다. 어머니는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原)의 딸이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1534년(중종 29)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선생이나 연장자와 교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당시 권세가이며 간신인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모함에 걸려 물러나 있다가, 김안로 일당이 물러난 뒤 등용되었다.
1538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이어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승진했으며,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강원도어사로 나가 공채(公債)를 적발하였다.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1544년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다.
인종 때 우승지를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명종이 나이가 어려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도승지로서 이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사림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송기수에게 말하면서 “규암(圭庵: 종형 宋麟壽의 호)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결국 송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으로 지목받았다.
1546년(명종 1)에 호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이어서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550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형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잠시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였다. 1555년 이조참판으로 등용되고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했는데, 형조참판으로서 성절사 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동지중추부사(知同知中樞府事)·예조참판을 지내고, 1559년 명종의 특명으로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곧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 명종은 성년이 되면서 윤원형의 전횡을 싫어하여 사림의 인물을 뽑아 대간에 배치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사를 바로 하고,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냈다. 그 동안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윤원형이 제거되자 을사사화 이후에 죄를 입은 당대의 명사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어 좌참찬을 거쳐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67년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덕흥군(德興君)의 제3자인 하성군(河城君)으로 대통을 잇게 했는데, 이 일로 여러 대신들 사이에서 입승(入承: 방계로 임금의 대를 잇는 것) 의절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 때 송기수가 경전에 의거하여 사군(嗣君)은 마땅히 오모백포(烏帽白袍)를 입고 소여(小輿)를 타고서 광화문 서협(西夾)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의절이 정해졌다.
이황(李滉)과 친숙했으며, 선조 초에는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문 구실도 많이 하였다. 1570년(선조 3) 이조판서를 다시 역임,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73년 좌참찬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4조(朝)를 섬기면서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했다고 하여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추파집(楸坡集)』이 있다.
상곡사를 나와 추파 송기수 묘소로 향하는 길에 하늘 높이 주운 칼(월남전에서 쓰던 정글刀)을 휘두른다.
대전광역시기념물 추파 송기수 묘소에 올라 아름드리 문인석도 안아보고
저 밑의 대청호를 내려다 보며 봄날 같이 따스한 햇살을 즐긴다.
마당쇠님이 횡재한 정글도를 들고 호령하는듯 한 이 문인석은 대전 최고의 석공이 아주 잘 다듬었는데
위 추파묘소의 문인석 보다 이 문인석이 조금 더 크다.
대청호수로로 내려와
주산동 상촌 버스승강장에서 오른쪽 농로로 내려가서
대청호 물속에 잠긴 옛 호남동로(湖南東路)의 흔적을 쫓아
대청호오백리길 제4구간 호반낭만길을 걷는다.
상촌마을 주민의 부탁으로 물에 잠긴 배도 끌어올려 주다가 낡은 밧줄이 끊어져 모두가 '꽈당'도 2번하고
고기잡이 배에 올라 추억 쌓기에 모두 빠져봅니다.
쓰레기도 알뜰하게 줍고
물에 살짝 잠긴 징검다리도 건너니
정우당 제실 앞 연못의 배롱나무가 반겨줍니다.
은진송씨 통덕랑 좌승지 묘소를 둘러보고
연꽃마을로 내려와 송영호화백을 뵈러 갔더니 출타 중이시다.
시 한수 읊어본 뒤 물가를 휘돌아
줄뫼 황새바위 전망대 주막에서 기력을 충전하고
커피샾으로 업종을 바꾼 옛 샘골농장 앞을 지나
호미고개를 넘어서니 이제부터 용계동(龍溪洞) 땅이다.
세종시에서 참가하신 '와이'님 뒤로 저멀리 마산동산성과 그 앞에 추동 '전망좋은곳' 오른쪽으로 물위에 떠 있는것은
대전상수도사업본부 추동취수장으로 들어가는 물을 자연정화하는 부레옥잠, 부들 등 수생식물을 키우는곳이다.
대청호수로를 잠시 걷다가 추동 '대청호자연수변공원' 구석구석을 둘러 본 뒤
17:23 대전역행 60번 버스에 오르니 늙은 까마귀의 목이 많이 마르다.
첨부/ 1900년대 옛 지도에 표시한 오늘 걸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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