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2 굿모닝충청에서 이기웅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장의 글 퍼 옴>
시험의 과정과 의의
무과 향시에 참여한 8명의 포수는 각각 3발씩 사격을 진행했고, 가야동 포수들은 모두 만점을 기록했다. 이들은 가야동의 지형과 산세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실전에 즉시 투입 가능한 인재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은 평소 가야산에서의 생활을 통해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1870년 가야동을 수호하던 병력 수준은 다음과 같다.
1, 남연군묘 수묘군 8명
2, 헌종태실 수묘군 8명
3, 가야동 포수 출신 화포군 8명 등이다.
4, 1868년 5월에는 244명의 병력이 수호하기도 했다.
가야동 향시와 유사한 사례: 온양온천 증광별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에 시작되어 조선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폐지되기까지 무려 937년간 이어진 중요한 국가 인재 등용 제도였다. 이 제도는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 등으로 나뉘었으며, 시행 시기에 따라 식년시(式年試), 알성시(謁聖試), 증광시(增廣試) 등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왕의 행차가 있는 지역에서는 백성들의 불편과 민원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잠재우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특별 과거시험이 시행되곤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온양온천 증광별시(溫行增廣別試)는 가야동 향시의 이해를 돕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온양온천과 왕의 행차, 증광별시
온양온천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자주 행차하던 곳으로, 왕의 건강 회복과 휴양을 위한 대표적인 행궁지였다. 이로 인해 온양온천에서는 특별 과거시험이 자주 열렸으며, 이를 '온행(溫行) 증광별시(增廣別試)'라 불렀다.
『온주지(溫州誌)』의 기록에 따르면,
현종 6년(1665년, 을사년): 문과 7인, 무과 200여 명 선발
현종 7년(1666년, 병오년): 문과 5인, 무과 90여 명 선발
숙종 43년(1717년, 정유년): 문과 7인, 무과 200여 명 선발
영조 26년(1750년, 경오년): 문과 7인, 무과 200여 명 선발
또한, 순조(純祖)는 13세 때 천연두(두창)에 감염되었으나 온양온천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순조 3년(1803년, 계해년) 2월(양력 3월)에 '경과(慶科,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보는 과거) 증광별시'를 5일간 성대히 시행한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온양온천에서 시행된 증광별시는 왕의 행차와 관련된 특별한 사례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가야동 향시와 온양 증광별시의 역사적 의의
가야동에서 시행된 향시는 조선 후기 지방사 연구 및 가야산 권역 근현대사 이해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는 온양온천의 증광별시와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두 지역 모두 왕실 행차로 인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방 사대부 및 무인 계층에게 출세의 기회를 부여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으로 작용했다.
흥선대원군의 1865년 가야동 행차와 유교적 통치 전략 및 효 사상
1865년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가야동 일원에 제각 명덕사를, 생활과 예배를 위한 공간 보덕사를 신축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7월부터 8월까지 37일간의 행차는 유교적 통치 전략이 있었다.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백성들에게 국가의 은혜를 베푼다는 상징적 행위였다. 효(孝)가 국가에 대한 충(忠)으로 확장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가야동 향시는 온양온천 증광별시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과거시험의 성격을 넘어 왕권 강화, 민심 수습, 지역 발전 촉진이라는 다층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특별 시행은 해당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며, 지방사 및 근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아닌가 한다.
문헌의 발굴과 의미
이번 칼럼의 중심이 된 문헌 ‘공충도덕산군가야동화포수시방몰기팔인방목성책’은 가야동의 수호를 위해 향시를 통해 무인 8명을 선발하는 역사적 배경과 시험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문헌은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가야동 병력의 수준과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이 문헌은 조선 후기 남연군묘를 비롯한 그 가족의 묘역이 조성된 가야동(현재 상가리) 지방 방어 체계의 실질적 운영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가야동 무과 향시의 역사적 가치
가야동 무과 향시는 평범한 무과 향시 이상의 사료이며 조선 후기 가야동 체제와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지방 방어 체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가야동 주민들의 헌신과 남연군 묘역 일원을 수호하려는 흥선대원군의 고민이 담겨 있다. 이 시험은 중앙과 지역 간의 협력 체계가 작동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으며, 지역 방어 체계에서 지방 사회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반영된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지역민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방어 체계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방안으로 기능했다. 이를 통해 조선 정부는 지역 방위를 강화하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을 모색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결론
1870년 가야동에서 시행된 무과 향시는 왕실의 공간으로서 가야동의 위상을 강화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이는 단순히 무예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넘어, 왕실의 묘역이 자리한 가야동을 보호하고 예배와 참배, 그리고 생활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보덕사를 창건하고, 작은 궁집을 여러 채 신축하며 가야동을 왕실의 위상을 반영한 작은 도시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향시는 1868년 덕산 도굴 사건 당시 가야동 주민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왕실 공간의 수호자로서 그들의 역할을 공식화하는 과정이었다.
가야동 포군(伽倻洞 砲軍)에 대한 전승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졌으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 확인되지 않아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관련 문헌이 발견되면서, 가야산 지역 향토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문헌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방위 체계와 지역 방어 조직의 실체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조선시대 군사 조직의 운영 방식과 내포 지역과의 연계성을 밝히는 데 새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이에 따라 향후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가야동 포군의 실체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향토사 연구는 문헌, 유적, 그리고 구전 전승을 함께 검토해야 하는 긴 과정이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발견을 계기로 가야산과 내포 지역의 군사적 역할을 보다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공충도덕산군가야동화포수시방몰기팔인방목성책(公忠道德山郡伽倻洞火砲手試放沒技八人榜目成冊)
가야산역사문화총서 (2000년)
윤상구 ‘조선조 온양 온행의 사회·경제적 성격’
김일환 ‘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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