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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간 풍습 10월 / 상달 고사(告祀) / 손돌풍

돌까마귀 2022. 7. 16. 10:53

상달고사의 어원

상달고사란 음력 10월에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고사라는 말은 세시풍속상에서 안택(安宅)이라는 말과 혼동되어서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점은 양자가 가정단위의 제사이며, 아울러 성주·조상·터주·조왕·삼신 등 모시는 대상신들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사는 주로 상달고사를 말하며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강하고, 안택 은 주로 정월에 행해지며 연초의 액막이 및 행운 기원의 의미가 강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사 혹은 안택이라는 이름은 중부를 포함한 중부이북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도신(禱神) 또는 도신제라 부른다. 최남선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고시레·고사·굿'을 같은 어원으로 보고 있다. 더불어 그 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의례를 '고시레'라 하고, '고사'는 굿의 규모는 아닌 중간 정도의 의례를 말하며, 장구를 울리고 무악(巫樂)을 갖추어 춤을 추는 등 규모가 가장 큰 의례를 '굿'이라고 하였다.

 

상달고사의 유래

상달고사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옛 기록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최남선은《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상달은 10월을 말하며, 이 시기는 일 년내 농사가 마무리되고 신곡신과(新穀新果)를 수확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기간 이다. 따라서 10월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게 되는 달로서 열두 달 가운데 으뜸가는 달로 생각하여 상달이라 하였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달에는 예로부터 무수한 종교적 행사가 전승되어 왔다. 고대에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등 추수감사의 의미를 내포하는 제천의식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팔관회(八關會)가 그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고사 혹은 안택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볼 때 상달고사의 유래는 고대 국가행사인 제천의식에 서 가정의례로 변모하여 전승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상달고사의 풍속

고사를 지낼 때는 좋은 날을 가려서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서 집안으로 부정이 들지 않도록 금기를 지킨다. 제물로는 시루떡과 술을 준비하는데, 떡은 떡의 켜를 만든 시루떡과 켜가 없는 백설기를 만든다. 백설기는 산신(産神)인 안방의 제석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제물은 안방을 비롯하여 사랑방, 머슴방, 나락가리, 쌀뒤지, 장광 등 집안의 곳곳에 조금씩 차려 놓는다. 의례는 대개 주부가 담당하는데, 제물을 차린 후 배례를 하고 손을 모아서 빌거나 축원을 하며 기원한다. 기원 하는 대상신은 집안의 풍요와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는 가신(家神)들이다. 가신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중요한 가신들로서 터주신·성주신·제석신·조왕신 등에게는 배례와 축원을 하고, 이 밖에 칠성신·측신·마당신·문신 등에는 제물만 놓는다.
가신이 아닌 마을수호신에게도 제물을 차려 배례와 축원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제물만 차려 놓는다. 이 때는 떡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상례이다. 고사를 조금 크게 행하고자 할 때는 무당이나 중을 청하여 행한다. 무당을 청하여 고사를 행할 경우는 제금만을 울리면서 축원을 하여 집안의 무사태평을 기원한다. 중을 청하여 고사를 행할 경우는 떡을 하지 않고 간단히 고사반(告祀盤)을 만들어 놓고 중이 염불을 왼다. 고사반은 그릇에 쌀을 수북이 담아놓고, 실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세워 꽂아 놓은 것을 말한다. 실타래는 무병장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어린이의 장수·건강을 비는 뜻이 강하다. 이때 부르는 염불을 또한 고사반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고사반으로는 '회심곡'이 있다. 고사와 더불어 가신들의 신체인 단지에 햇곡식을 갈아 넣는 풍속이 있다. 이러한 신체는 지방마다 부르는 명칭과 모시는 장소, 시기 등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중부지방에서는 터주 라고 하여 뒤꼍의 장독대 옆에 짚주저리를 씌운 단지 안에 곡식을 넣고 집터의 터신으로 섬기고 있다. 호남지방에서는 이것을 철륭단지라고 부르는데,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가택의 수호신으로 서 성주가 있는데, 이것은 대들보나 대공에 한지를 접어서 신체로 삼는 경우도 있고, 마루 한구석 에 큰 독을 놓고 그 안에 철따라 보리와 벼를 갈아 담아 두기도 한다. 영남이나 호남지방에는 대개 한지보다는 성주 독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전북지방에서는 안방의 윗목 시렁 위에 조상단지를 모시고 있는데, 상달에 단지의 곡식을 갈아 담아서 조상숭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조상단지라는 말은 중부지방에 많이 분포해 있는데, 영남 에서는 세존단지, 호남지방에서는 제석오가리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 단지에 햅쌀을 갈아넣을 때, 단지 내에 있던 묵은 쌀은 남을 안주고 식구들끼리만 밥을 지어 나누어 먹는다. 묵은 쌀을 꺼 낼 때, 그것이 곰팡이가 슬거나 썩거나 하면 집안의 흉조이고, 깨끗하면 집안의 길조로 여겼다. 그래서 신곡으로 갈아 담을 때는 쌀을 잘 말리고 정성을 다한다.

 

상달고사의 시절음식

10월은 다양한 곡물을 농가마다 풍성하게 보유하고 있는 시기로서, 예로부터 다양한 시절음식이 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절음식으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0월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 번철(燔鐵)을 올려놓고 소고기에 기름·간장·계란·파·마늘·고춧가루 등 양념을 하여 화롯불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煖爐會)라고 한다. 이 달부터 시작되는 겨울의 추위를 막고자 예로부터 난로회를 시절 음식으로 즐겼다. 또 쇠고 기·돼지고기·무·외·훈채·계란을 섞어서 장탕(醬湯)을 만드는데, 이것을 열구자신선로 (悅口子神仙爐)라 하였다. 상고하면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북경 사람은 10월 초하루에 술을 걸러 놓은 후 고기를 화로에 구우면서 둘러앉아서 마시며 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 한다고 하였다. 또 상고하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10월 초하루에 유사(有詞)들이 난로와 술을 올리라고 하면 민가에서는 모두 술들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했다고 하며, 지금의 풍속도 그와 같다. 10월에는 메밀이나 보릿가루로 만두를 만드는데, 채소·파·닭고기·돼지고기·쇠고기·두부 등으로 소를 만들어 싸고 이것을 장국에 익혀서 먹는다. 또 밀가루로 세모나게 빚은 만두를 만드는데, 이것을 변씨만두라 한다. 그것은 변씨가 맨 처음 만들었던 까닭에 그런 명칭이 생겼을 것이다. 생각하면 사물기원(事物記原)에 제갈공명이 남만국의 맹획을 정벌할 때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남만의 풍속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신에게 바쳐서 제사하면 신이 받아먹고 음병(陰兵)을 보내 준다고 했다. 이에 제갈공명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양고기, 돼지고기를 섞어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모양을 만들어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신은 이것을 받아먹고 군사를 보내 주었다. 후인들이 이것을 만두라고 한다고 했다. 만두는 큰 소쿠리에 넣어서 찌므로 증병 (蒸餠) 혹은 농병(籠餠)이라 한다. 또 후사정(侯思正)이 먹었을 때 반드시 고기에 파를 잘게 썰어 섞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멥살떡, 꿩고기, 김치, 만두가 있으나 김치가 가장 조촐하고 소박한 시절음식이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제갈공명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요즈음 반찬 중에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다.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 여기서 포라는 것은 두부를 말하며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신하 회남왕(淮南王)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고하면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이르기를 솥을 닦고 여기(黎祁)를 지진다는 글 뜻의 주(註)에 촉인(蜀人)은 두부를 여기(黎祁)라고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지금의 연포가 곧 이것인 것이다. 아직 자라나는 쑥을 뜯어다가 쇠고기와 계란을 넣어 섞어서 떡을 만들고 볶은 콩가루를 꿀에 섞어 바르면 이것을 애단자(艾團子)라 한다. 또 찹쌀가루로 동그란 떡을 빚고 삶은 콩을 꿀에 섞어서 불그스레한 빛이 나게 만든 것을 '밀단고' 라고 하며, 이 음식은 거의가 초겨울의 시절음식이다. 찹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하여 크고 작게 썰어서 이것을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면 누에 고치 마냥 부풀어오르지만 그 속은 빈 구멍이 난다. 여기에 흰 깨, 검은 깨, 흰 콩가루, 파란색 콩 가루 등에 엿물을 뿌려서 붙인다. 이것을 강정이라고 한다. 상고하면 송나라 남전여씨(藍田呂氏)의 가품명(家品名)에 원양소(元陽蕭)가 바로 이것이다. 또 상고하면 중국의 병이한담(餠餌閒 談)에 수병은 콩가루에 설탕 혹은 깨를 발라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호마병(胡麻餠)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것도 역시 같은 떡 종류이다. 또 다섯 색깔의 물들인 강정도 있으며, 잣을 다시 잣가루에 묻혀서 칠한 것을 송자강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찹쌀을 불에 살짝 튀겨 꽃 모양을 만들고 엿으로 붙인 것을 매화강정이라 한다. 서울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김장독에 김장을 담근다. 여름철의 장담기와 겨울철의 김장을 담그는 것은 사람들이 일년 중의 중요한 행사계획이다." 당시의 시절음식은 이렇듯 다양하나 사회문화적인 변화로 인해, 오늘날 먹거리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장은 오늘날 여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다양화 되고 있다.

 

손돌풍의 유래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혹은 손석풍이라 한다. 이 손돌풍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 배경설화인 '손돌풍 설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 손돌목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손돌목 전설, 손돌 전설이라고도 하며, 이는 음력 10월20일께 부는 차가운 바람신인 손돌신의 신화이며, 경기도 김포군과 강화군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의 지명유래담이다.
손돌설화의 기본형은 손돌목, 손돌무덤이 있는 강화, 인천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손돌풍 설화의 전형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으므로, 그 뒤 이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풍이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게 되었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닷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 가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부는 날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 고 한다. 또 어부들은 이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 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돌풍에 관해서는《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그 기록이 보이며 《열양세시기(洌陽 歲時記)》10월 조에는 "강화도로 가는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그곳을 손돌목이라 한다. 그리고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막힌 곳을 목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란 자가 있었는데, 10월 20일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그곳에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불고 추위가 매우 극렬하므로 뱃사공들은 경계를 하고,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기후로 봐서 이 때가 되면 계절풍이 불고 따라서 몹시 추워지므로, 여기에 손돌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서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