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이면 내고향 뒷동산 작오산에는 참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참꽃은 양지쪽 묘지의 잔디밭에 돋아난 삐삐와 함께 어린 우리들의 간식거리로도 훌륭하였었는데
보리고개를 넘느라 굶주린 배를 채우기 보다는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갈구를 달래기위해 꽃잎은 마냥 우리들의 입술을 붉게 물들였었다.
겨우네 찬도랑 옆 배방골 논바닥의 얼음판을 지치든 손과 발이 우수,경칩을 지나면서 물 웅덩이를 찾아 해매었고,
춘분과 청명을 지나며 뒷동산으로 돌린 발걸음은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목얄비알에서 짠디도 케먹고 찔레도 꺽어 먹으며 봄을 맞았었다.
어린 나이에 형들의 뒤를 무작정 쫒아 오르다 사춘기가 지나며 사타구니에 검 덤불이 돋아 난 후에야 그 붉디 붉은 진달래가 6.25사변의 와중에 낙동강 전선에서 흘린 피아간의 핏빛으로 그렇게 붉어 졌다는것을 느끼게 되었고, 세월이 더 흘러 환갑을 넘긴 나이에 고향길 다니러 오가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끊어졌던 낙동강 인도교를 보면서 좌우익의 이념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호국의 다리로 명명되어진 그 인도교 아래로 그때 그모습 그대로 낙동강은 흘러 내려 가고있다.
칠백리를 그것도 4대강 사업으로 파해쳐 뒤집어진 강바닥을 더듬으며...
60년대 초 주세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우리 고향땅의 소주 이름은 칠백리였다.
바라소주란 이름으로 토기 항아리에 담겨진 요즘의 희석식 소주가 아닌 증류식 소주로 빈 소주병을 가지고 가면
호스를 꽂아서 덜어 팔던 30도의 그 소주맛은 카~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하교길에 들린 공영사라는 이름의 만물가게는 시멘트에서 밀가루까지, 양잿물에서 세수비누까지, 철물, 문방구, 일용잡화에 온갖 먹거리를 다 파는 요즘의 대형 슈퍼마켓으로 책가방에서 꺼낸 빈 소주병을 건내주면 병목까지 바라소주를 가득채워 콜크마개로 막아주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을앞 선조묘소 잔디밭에 앉아, 딱 한모금 목구멍에 넘기면 그 싸~하고 톡쏘는 그맛은 카~ 바로 그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민속주란 이름을 달고 증류식 소주가 다시 세상에 나오면서 그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국세청에서 주정을 배급받아 대량으로 생산되는 희석식 소주는 25도에서 23도, 21도로 내려 가드니, 지금은 19.5도로 낮아져 버려 주당들의 카~소리는 들어 본지 오래 되었으니 어쩌면 내가 생막걸리에 빠져들수 밖에 없도록 만든건 지금의 소주가 아닐까?
2011.4.3
고향 잔치에 다녀오며
잔칫술에 취한 돌까마귀가
무궁화호 열차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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