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까마귀(石烏) 창작글 모음

월간 교양지 "샘터"의 지령 500호를 축하하며

돌까마귀 2022. 7. 30. 09:40

60년대 말 삼선개헌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등학교를 못다 마치고 생활전선에서 노심초사 하던 시절,

퇴근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구역전 선술집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기울이다 비몽사몽 간에 통근열차를 타고

고향땅 왜관역에 내려 땅거미 진 역광장을 지나 중앙약국 앞에 서면, 구장터 쪽, 신동관 못미쳐 왜관제과 건너편 처마밑에 발그래 한 백열등이 빛나고 있었으니 만화,소설,잡지를 빌려주던 만화방 불빛이었다.

 

허문영, 방인근의 이름을 도용한 삼류작가의 야한소설이나 김충의 무협소설을 빌려와 자정 넘어서까지 탐독하기도 하고 한달에 한번씩 발행되던 명랑, 아리랑, 영화잡지, 야담과 실화등 대중잡지를 빌려보기도 하였으나

선데이서울을 필두로 쏟아져 나온 주간한국, 주간경향등 주간지가 한가운데의 두 페이지 짜리 여배우의 야한 사진과 야한 이야기를 앞세우고 스무살이 채 안 된 숫총각의 시선을 사로 잡았으니 70년대는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의 연설을 듣기위해 대구 수성천변을 가득매운 100만 청중의 바램도 헛물만 켠체 부정투표인지 개표조작인지 아무도 모른체, 결과적으론 49 대 51로 날러가고 "야당의 도시 대구"라는 별칭도 역사속으로 묻혀가고 있을 즈음 통근열차의 마주보는 장의자에 앉아서 읽어보는 손바닥 크기의 월간 교양지 "샘터"는 신선한 충격 바로 그것 이었다.

 

 

4호부터 읽기 시작하여 두달뒤 정기구독을 신청하며 창간호부터 3호까지를 보너스로 받아보고 매달 발행일이 가까워 오면 우체부가 다녀가지 않었냐고 어머님께 여쭤보던 바로 그 "샘터"가 10월로 지령 500호를 맞이한단다, 1970년 4월호를 시작으로 장장 41년 6개월동안 한번도 쉬지않고 달려 왔으니 감히 내가 축하를 보낸다.

 

엄앵란의 시대 후 남정임, 고은아, 문희, 윤정희의 시대가 열리고 이소룡의 정무문과 프랑코네로, 줄리아노젬마, 크린트이스트우드의 마카로니 웨스턴과 숀코네리의 007씨리즈가 극장간판을 매꿀 즈음 군대 생활을 시작하여,

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포스터가 동네마다 거리마다 넘쳐나 각급 학교의 게시판까지 도배하던 유신초기의 암울했던 시기에 군대 생활을 마칠 때 까지 내무반 서고에는 언제나 "샘터"가 작은 크기의 문고판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휴가같던 전우가 귀대 길에 사온 야한 주간지와 성인 만화들 보다는 인기가 못하였지만, 결코 유식하지도 않고 저질스럽지도 않은체 사람사는 이야기로 채워진 글들이 가득한 "샘터"는 80명 정도의 내무반 전우들이 돌려 읽기에는 목마름이 너무 커, 내가 전역한 뒤 정기구독으로 보내주기도 하였으니 40년전 그 시절 생각이 다시금 새로워 진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정기구독으로 받아본 "샘터"는 70년대 말 대전으로 옮겨 오면서 나의 손을 떠나 자주 접하지는 못하였지만 "좋은생각"이라는 비슷한 유형의 월간지도 창간되어, 간혹 고향길 열차를 타면서 종종 읽어 보게 되는데 벌써 500호가 나왔다니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 지령 1000호, 2000호를 넘어가며 영원히 우리들 마음의 양식이 되어 줄것이라 굳게 믿으며 다시한번 지령 500호 발간을 축하 드린다.

 

2011년 9월 25일 돌까마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