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언저리길 답사후기

가을빛이 짙은 근심이 없는 無愁天下마을 한 바퀴

돌까마귀 2024. 11. 21. 07:48

언   제 :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어디서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을 둘러싸고있는 보문산 남녘 산자락 한 바퀴

누구와 : 한밭언저리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丹楓이 참 이상한 올 가을이지만 그래도 보문산의 단풍을 놓지기 싫은 사람들이 10명이나 오셨다. 

 

'보문산 행복숲길'이라고 불리는 오-월드(대전동물원) 뒷길을 지나

 

대전둘레산길 제12구간 동물원길이 교차하는 사각정자에서 마른 목을 축이며 숨을 돌리고

 

다시 길을 나서니 나이 든 어린애들이 단풍놀이가 한창이다.

 

행복숲길에 버려진 쓰레기도 줍고

 

'보문산 치유의 숲'  無障碍 데크로드로 내려서니

 

나이 든 어린애들의 단풍놀이가 더욱 다양하게 펼쳐진다.

 

ㅎㅎㅎ 이제 그만하고 갑시다.

 

보급담당 1명이 빠진 9명의 산벗들의 단체사진

 

사랑해요~ 우리 모두~

 

 

요주의가 필요한 두 사람의 사랑고백도 받으며

 

4바퀴 반이나 되는 '치유의 숲' 산책로 중 밖에서 3번째 산책로를 따라 무수동 배나무골을 내려간다.

 

보문산행복숲길 탐방지원센터에 근무하는 김인수 숲길등산지도사가 '碑木'을 열창하는 동안 마른 목도 축이고

 

다시 가을이 짙은 배나무골을 내려가니

 

마중물 지도사의 '낙옆따라 가버린 사랑'은 베낭속 먹거리를 모두 쏟아내게 한다.

 

보문사 터로 올라가는 물길을 거슬러

 

작은 폭포 앞에서 '라이언 정관충'님의 노래도 한곡 듣고

 

바람소리, 물소리도 들으니 늙은까마귀의 浮火덩어리가 모두 삭아내렸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밟는 땅은 1977년에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에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4호로 관리 주체가 바뀐 옛 普文寺 터이다.   

 

국가유산청 홈피에서 퍼 온 국가유산 설명

보문사터는 보문산 정상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절터의 범위는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 정도로 남쪽을 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3단을 이루고 있다.

아랫단에는 길이 10여m, 높이 1m에 달하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앞면 6칸·옆면 2칸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두번째 단에는 2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파괴가 심하여 건물의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제일 윗단 앞에는 축대 바로 밑에 괘불 지주 한 쌍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윗단이 대웅전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절터에서 발굴되는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은 주로 조선시대의 유물들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도산서원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문사가 이 지역의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낡은 鐵材울타리 밖의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  普文寺址石槽도 살펴보고

 

국가유산청 홈피에서 퍼 온 국가유산 설명

보문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사찰내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곳이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전시 탄방동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서원의 '연혁지'에 이 절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법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는 건물자리 5개와 석조·괘불지주·맷돌·세탁대 등이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는 전체가 4각을 이루고 밑바닥과 각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졌다. 바닥아래와 윗부분에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빼기 위한 구멍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의 구멍이 주전자 꼭지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내렸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32년 전에 중구청에서 다듬은 우물도 살펴본다.

 

구완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다 보문사 터를 뒤 돌아 보고

 

2022년 집중 호우 때 유실되어 나와 계백장군이 땀 흘리며 복구한 나무다리를 2개를 지나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珍羞와 盛饌이가 일행들을 반기며 푸짐한 午餐場을 차려 놓았다.

 

2시간 동안의 푸짐한 午餐을 마치고 보급담당 2사람이 먼저 떠나고

 

주변정리까지 완벽하게 마친 뒤 치유의 숲 가장 바깥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나가다가

 

고개 마루에서 산줄기에 올라서니 무수동과 구완동을 가르는 능선길이다.

 

방향표지 앞에서 잠시 숨 돌리며 목도 축이고 달친님의 노래에 귀 호강도 마친 뒤

 

발목까지 빠지는 낙옆을 헤치고 운남산 산신각에 닿으니 이제부터는 평지길이 이어진다.

 

환경미화 담당 '라이언'님이 어깨가 아프도록 메고 내려온 쓰레기도 길가에 내려 놓고

 

안동권씨 유회당으로 들어가 곳곳을 살펴 본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유회당(부)기궁재 (有懷堂(附)奇窮齋)

유회당과 기궁재는 권이진(1668∼1734)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과 그에 소속된 재실로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유회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건물로 활수담이라는 작은 연못 뒤쪽에 있으며, 앞면과 양쪽 면에 난간이 돌려진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인 기궁재는 ㄱ자형 건물로서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건넌방·부엌 등이 있으며, 1920년대에 다시 지었다.
이곳에는 유회당 권이진 선생이 아버지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지은 시묘소인 삼근정사와 선생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유회당(有懷堂)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높이 펼쳐지고

 

기궁재 (奇窮齋)는 왼 쪽 뒤편에 있는 宗孫의 거처였지만 지금은 비어있고 불천위 제사 때 문중이 모인다.

 

기궁재 대문 밑에있는 장판각에는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유회당판각 (有懷堂板刻)이 보관되어있고

 

국가유산청 홈피에서 퍼 온 국가유산 설명

조선후기 문신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1668~1734)의 문집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 권이진은 송시열의 외손자로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1728년(영조 4) 호조판서가 되어 궁중에서 민간의 전답을 매입하지 말 것과 공물을 정액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했다.
유회당 판목은 순조 초(1807~1827)에 유회당의 증손자인 좌옹 권상서(左翁 權尙恕, 1767~1835)가 판각한 것으로 유회당 부속건물인 장판각에 246판 중 244판이 보관되어 있다. 재료로는 배나무와 소나무를 사용하였다.
이 판목에는 시(詩), 소(疏), 장계(狀啓), 의(議), 서(書) 등이 포함되어 있고 유회당이 재직하던 당시(1700~1734)의 사료가 많이 실려있다. 이 가운데 대일본외교에 관한 사료와 성리학에 관계된 자료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학문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오른쪽 맨 위에 있는  三近精舍는 有懷堂 權以鎭이 아버지 權惟의 侍墓살이를 위해 지은 집으로 그 예가 아주 희귀하다.  

 

울타리 바깥 여경암 가는 길 옆에 있는 權惟의 

 

한참을 둘러 본 뒤 밖으로 나와

 

농촌체험마을 관리소 앞에있는 황금빛 황소와 인사를 나눈 뒤

 

깡통열차도 타 보고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안동권싸유회당종가일원(安東權氏有懷堂宗家一圓)에 들러 구석구석을 살펴 본다. 

 

초가지붕의 4각정자 광영정은 4방에 다른 현판이 붙어있는데 남쪽에는 광영정(光影亭), 서쪽에는 수월란(受月欄), 북쪽에는 인풍루(引風樓), 동쪽에는 관가헌(觀稼軒) 등의 편액이 걸렸다. 광영정은 옛 시 ‘天光雲影共徘徊’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광영정 옆에 있는 네모난 연못을 徘徊潭이라고 부른다. 이 연못은 마을 위쪽에서 흐르는 물을 자연스럽게 모아 만들었는데, 물길은 광영정 밑을 지나 앞의 구완천으로 흘러 나간다.

 

국가유산청 홈피의 국가유산 설명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이 처음 터를 잡았던 장소이다. 普門山 서남 방향으로 제일 아래에 안동권씨 집성촌이 있고, 그 가운데에 유회당 종가가 있다. 현재의 종가는 유회당의 아들 權泂徵이 세운 것으로,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77년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에 옮겨 지은 것이다.
보문산 자락에 거의 정남향으로 자리잡은 고택의 영역에는 안채, 사랑채, 사당, 徘徊潭, 光影亭 등이 있다. 원래는 행랑채가 있었으나 광복 후 퇴락하여 없어졌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규모를 작게하고 건물 사이의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좌측 한칸은 대청을, 중앙의 두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맨 우측칸은 전면에는 한간의 방을 들이고 후면 상부는 다락으로 아래는 함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거주하면서 다소 구조가 변경되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비교적 굵은 기둥을 사용하여 처마를 길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안채는 붕괴되었던 것을 2000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4칸통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안방과 건넌방을 들였으며 안방의 앞쪽으로 부엌을 들인 ㄱ자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구조는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 지붕을 올렸다.
사랑채의 후면이자 고택 영역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은 정면 세칸의 규모로 전면에 모두 퇴칸을 두었으며 내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쌓은 두단 높이의 기단 위에 큼직한 자연석 초석을 두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상부에는 단순한 익공계 공포를 두어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올렸다.

 

운암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유등천 침산교가 걸린 '산서로' 길가의 구멍가게 '금산슈퍼'에서

 

수기님이 챙겨준 캔맥주로 갈증을 달래고 곧 바로 달려온 30번 외곽버스에 올라

 

덕산 박홍준님이 한턱 쏠 만찬을 위해  사정동 상당마을의 '유림식당'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