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와 추억여행

안동 유교문화길 제2구간 하회마을길과 巴山亭

돌까마귀 2024. 12. 24. 12:13

<2024년 12월호 안동문화 必에서 퍼 옴>

 

파산정은 겸암과 서애의 종숙부이며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로 칭송받았던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의 정자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좌우가 방이고 어간이 마루다. 정자를 찾아가는 길은 풍산읍에서 구담 방면으로 이어지는 914번 지방도(지풍로)를 따라 풍천면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풍일로로 연결되는 회전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광덕교를 만난다. 광덕교를 건너지 않고 강변가든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서면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안동시 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파산정은 풍이로 36-37에 위치한다.

 

류중엄은 호를 파산이라 지었는데, 이는 주변의 지형이 산은 활[弓] 같고, 물은 새[乙] 모양으로 흘러 마치 ‘파(巴)’ 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물의 흐름을 본 따 파산이라 지었다. 정자는 앞쪽으로는 광덕마을이 강 건너 언덕 너머로 살포시 보이고 멀리 부용대가 보인다. 비록 정자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부용대 양측에 겸암의 겸암정사가 있고, 서애의 옥연정사가 있어 파산정과 잘 어울린다.

파산은 1564년(명종19) 강 건너 화천서원이 바라보이는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자 스승인 퇴계 선생에게 물었더니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을 받고 기뻐했으나 미처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선생이 정자를 지으려고 했던 곳을 가리키며 애석해하였던 것을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옛터에 정자를 짓고 선생의 호를 따 파산정이라 편액을 걸었다. 정자는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화천)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주위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파산정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 오른쪽으로는 광덕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에는 화천서원과 옥연정사를 품고 있는 부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산정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아마도 광덕마을에 파산의 후손들이 살고, 파산 종택이 있기 때문이다. 풍산 류씨는 하회마을에 겸암파와 서애파가 있고, 광덕에 파산파가 있다고 하지만 파산종택도 원래는 하회마을에 있었다. 그러다가 류도흥(1894~1946)이 광덕마을에 있는 초가를 매입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초가를 기와로 바꾸어 지내다가 약 60년 전 류길영(1912~1979)이 지금의 종택 건물을 건립하였다. 파산이 처음에 정자를 지으려고 했던 자리는 하회마을 초입 화천서원(花川書院)이 건너다보이는 둔덕 위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가 외지고 협소하여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광덕리 맞은편 강가인 지금의 자리에 터를 마련하여 지었다.

파산 풍산 류선생 유허비, 선생이 정자를 지으려고 했던 터에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선생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학문과 덕행이 남달라 당시의 공론에 의해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라고 일컬어졌다.

숙질 관계가 되며, 동시에 도산에 가서 동문수학한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두 형제 이외에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과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과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안동의 타양서원(陀陽書院),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유허비에서 바라보면 부용대 동편(왼쪽)의 옥연정사와 가운데 화천서원이 지척으로 가깝고 화천 물길이 태극을 이루며 돌아 흐르는 끝부분에 파산정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