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이재국의 글 퍼 옴
MBC 청룡 초대 감독 선임 과정과 원년 멤버 이야기
프로야구 6개팀 중 감독을 결정치 못했던 MBC는 14일 일본프로야구 긴테쓰서 활약하고 있는 백인천 선수(39)를 감독으로 확정했다. 그동안 팀명칭을 공모하고 감독 선임에 고충을 겪어온 MBC는 13일 일본의 백인천과 국제전화를 연결, 감독 취임 승낙을 받은 것이다. <1981년 12월 14일자 중앙일보>
1981년 하반기에 프로야구에 동참할 6개 기업 선정과 연고지를 확정하는 일부터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어 원년 멤버로 참여하는 6개 구단은 12월 11일을 전후해 팀의 애칭을 속전속결로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사령탑을 선임하는 것도 6개 구단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당시엔 감독 인재풀이 더더욱 좁았던 시절. 후보군을 추리는 과정에서 구단끼리 겹치는 인물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자천타천 후보들이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MBC는 가장 늦은 12월 14일 초대 사령탑을 깜짝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름 아닌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의 현역 선수 백인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 29일 서울 프랜차이즈 출신 선수를 놓고 OB 베어스와 2대1 드래프트를 통해 MBC 청룡 원년 선수들을 뽑았다.
이들은 최초의 서울팀 프로야구 선수단이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훗날 LG 트윈스와 직결되는 인물이 적지 않기에 우리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982년 KBO 원년 6개 구단 초대 사령탑들.
아래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MBC 청룡 백인천 감독, 삼미 슈퍼스타즈 박현식 감독, OB 베어스 김영덕 감독, 롯데 자이언츠 박영길 감독, 해태 타이거즈 김동엽 감독, 삼성 라이온즈 서영무 감독.

김동엽? 김영덕? 배성서? 박현식?…MBC 청룡 초대 감독 하마평
MBC 청룡 초대 사령탑으로 백인천 감독 겸 선수가 확정되기 전에 재야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던 야구계 인사들이 몇몇 있었다.
1997년에 작고 한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대표적이다.
김동엽은 실업팀 롯데 자이안트 창단 감독(1975~1977년)과 성균관대 감독(1978년), 한양대 감독(1978~1981년)을 역임하면서 언변과 쇼맨십에서 탁월한 감감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그라운드의 인기를 등에 업고 MBC 라디오 프로그램 ‘홈런 출발, 김동엽입니다’를 진행할 정도로 방송에서도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MBC 이진희 사장이 프로야구 창단 작업 과정에서 그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할 정도로 관계가 깊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김동엽을 두고 MBC 청룡 초대 감독설이 흘러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는 호사가들의 이야기였다.
1995년 펴낸 김동엽의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를 보면 MBC 청룡 초대 감독직을 제안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일찌감치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을 수락했던 상황이었다.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 1981년 11월 청와대에 불려 들어가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원년 프로야구팀을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내세운 조건이 경복고 선배인 김동엽이 초대 사령탑을 맡아주는 것이었다.
김동엽은 흔쾌히 수락했고, 해태는 1981년 12월 10일 원년 6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언론을 통해 김동엽 초대 감독을 공식 발표했다. 삼성이 중앙대 서영무 감독을 내정하는 등 각 팀마다 내부적으로는 사령탑 선임 작업을 속속 진행하고 있었지만, 언론을 통한 공식 발표는 이날 해태 김동엽 감독이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김동엽은 KBO 최초 프로야구 감독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셈이다.

사실 MBC는 OB 베어스 초대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 당시 천안북일고 감독(2023년 작고)을 유력한 초대 감독 후보 중 한 명으로 올려 놓고 있었다.
재일교포 사이드암 투수 출신으로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실업야구 시절 한 차례 퍼펙트게임과 세 차례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레전드. 1980년 천안북일고 감독을 맡아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동열과 김건우를 앞세워 한국야구 사상 최초로 세계청소년 대회 우승을 지휘하며 명장 반열에 올랐다.
실제로 MBC는 김영덕 감독에게 감독직 제의를 하기도 했고, 당시 언론에서도 사실상 내정해 놓은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김영덕 감독님은 살아생전에 저한테도 여러 차례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는데 OB 베어스에서 가장 먼저 창단 감독 제의가 와서 구두상으로 수락을 한 상황이었대요. 그런데 다음날인가, 다다음 날인가 MBC에서도 ‘감독을 맡으실 의향이 있느냐’는 제의가 왔다고 해요. 그때 감독님이 속으로 잠시 갈등을 하다 ‘그래도 신의가 있지 않느냐’면서 MBC 제안을 거절하고 OB 초대 감독을 맡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만약 OB에서 며칠 후에 연락했더라면 오히려 MBC 초대 감독이 되셨을지도 모르죠.”
일구회 구경백 사무총장의 증언이다. 그는 OB 베어스 원년 매니저로서 당시 김영덕 감독을 측근에서 보좌했다.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동국대 배성서 감독(2025년 3월 작고)이다. ‘스파르타식’ 강훈련으로 유명했던 그는 영남대 야구부 창단 감독(1973~1977년)을 맡아 무명의 김재박을 한국야구 최고 스타로 길러냈고, 동국대 감독(1977~1981년) 시절엔 김성한에게 ‘오리궁둥이 타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조광식 MBC 청룡 초대 단장(2011년 작고)은 동아일보 기자와 체육부장, MBC 스포츠국장을 지내면서 체육인들과 매우 가까웠는데 그중에서도 배성서 감독과는 호형호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만약 백인천이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면 배성서가 초대 감독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구도였다. 조 전 단장은 실제로 1981년 12월 30일에 진행된 OB 베어스와 2대1 드래프트 당시 배성서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여기에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도 MBC 초대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현식 감독은 인천을 연고로 출발한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사령탑을 맡게 됐다.
백인천 이전에 하마평에 오르내린 4명을 언급하는 것은 이들이 모두 훗날 MBC 청룡과 LG 트윈스 지도자로 역사적 인연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김동엽은 1983년 후기리그에 청룡 사령탑을 맡아 구단 역사상 최초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해태에 1무4패)의 책임을 지고 퇴진했다가 1985~1987년 다시 청룡 감독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배성서는 1989년 MBC 청룡 마지막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박현식은 1990~1991년 LG 2군 감독, 김영덕은 1997~1998년 LG 2군 감독을 맡아 후진을 양성했다.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 슈퍼스타 백인천을 품다
앞서 설명했듯이, MBC가 처음부터 백인천을 초대 감독 후보에 올려둔 것은 아니었다. 1942년생인 백인천은 1962년 약관의 나이에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진출해 1981년까지 20년간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이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78, 1831안타, 209홈런, 211도루, 776타점을 기록했고, 1975년에는 타율 0.319로 퍼시픽리그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백인천은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모든 스포츠 선수를 통틀어 최초로 해외 프로 무대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는데, 최초로 프로 스포츠 개인 타이틀을 따내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투수는 통산 200승, 타자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면 명구회 회원 자격이 주어졌다. 백인천은 2000안타까지 169개를 남겨놓고 있었다. 당연히 2000경기와 2000안타 기록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즈음에 그의 야구인생 항로를 바꾸게 되는 두 가지 큰 일이 발생한다. 하나는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1981년 10월에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일이었다. 2015년 펴낸 그의 자서전 ‘백인천의 노력자애’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급히 귀국한 그에게 형제들이 “아버님이 너를 불러들이려고 지금 돌아가셨나 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백인천은 귀국보다는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더 이어가겠다는 뜻이 강했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식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1월 21일 아버지의 49재를 위해 다시 일시 귀국했다. 1982년부터 한국에 프로야구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터였다. 당시 중앙일보의 귀국 인터뷰를 보면 백인천의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계속 긴테쓰에서 뛰게 됐습니다. 한국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오겠습니다. 아직 그런 요청을 받은 일은 없지만 그동안 일본에서 배우고 익힌 프로야구를 고국의 후배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더없는 영광이지요. (내년 시즌 목표는) 2000경기 출전입니다. 앞으로 30게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일본에는 13명이 2000시합 출전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 길에 프로야구 소식도 좀 자세히 알고 또 조언도 하고 싶습니다.”
이때만 해도 MBC의 백인천 영입 움직임은 없었다. 그런데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백인천이 “한국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오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몇몇 구단에서 영입에 대한 검토를 하기 시작했고, MBC도 깊숙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인천은 11월 27일 일본으로 돌아간 뒤 후쿠오카에 설립돼 있는 개인 후원회에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선수생활 마무리를 한국에서 하고 싶다”는 고민의 흔적을 슬쩍 내비쳤다.
그의 자서전 "노력자애"를 보면 후원회에서 “그대가 일본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모국 덕분이다. 어려운 시기에 필요하다고 하니 가서 힘이 돼주는 것이 좋겠다”며 한국행을 권유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친지들에게도 물어보니 “좋은 생각”이라며 부추겼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MBC 측의 감독 영입 제의가 날아들었다.
KBO 초대 사무총장이 되는 이용일씨가 국제전화를 통해 의사를 타진한 것. 이용일 사무총장은 백인천의 경동고 선배였다.
백인천은 결국 12월 13일에 국제전화를 통해 MBC 초대 사령탑을 수락했다. 그러면서 일본프로야구에서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을 포기하고 이튿날인 14일 급거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KBO 최초이자 유일한 ‘감독 겸 선수’ 백인천
하지만 계약서에 사인하기까지 구체적인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초 MBC는 1942년 생인백인천이 만 40세가 되는 해이기에 초대 사령탑만 맡아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백인천은 선수로서 한국에 프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결국 ‘감독 겸 선수(플레잉 감독)’라는 절충점을 찾았다. 다만 계약기간 3년에 첫 1년은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고, 남은 2년은 감독만 맡는다는 조건이었다. 대우 문제도 불거졌다. 백인천은 감독과 선수 연봉은 물론 감독 계약금과 선수 계약금을 별도로 계산해주기를 바랐다. MBC 구단에서는 이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결국 백인천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MBC 감독 겸 선수 계약을 마쳤다. 공식 발표로는 KBO가 규정한 감독·선수 계약금 및 연봉 기준에 따라 감독A급 계약금 2000만 원을 받고, 감독A급 연봉 1200 만원과 특급선수 연봉 2400만 원 등 총액 5600만 원의 조건이었지만,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총액 6000만 원(감독 몫 3000만 원+선수 몫 3000만 원)에 MBC와 계약한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돈으로 말하는 것이 프로죠. 하지만 돈이 우선이었으면 한국에 안 왔을 거예요. 사실 일본에서 벌 수 있는 돈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프로이기 때문에 감독과 선수로 정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었죠. 제가 일본에서 뛸 때 일본 애들이 ‘너의 나라에는 프로야구도 없잖아’라며 깔보고 그랬어요. 그게 너무 서글펐어요. 일본 가서 한번 설움을 받아봐요.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니 그게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다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왔던 거죠. 내 일본 기록은 아무 것도 아니라 그랬어요.”
이는 2022년 KBO 40주년 당시 팔순의 나이에 접어든 백인천 전 감독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MBC 청룡과 LG 트윈스로 이어지는 구단 역사에서 최초의 감독은 이렇게 결정됐다.

최초의 MBC 청룡 선수는 어떻게 뽑았을까? OB 베어스와 2대1 드래프트
서울 MBC와 대전 OB의 스카우트 선수 윤곽이 드러났다. 양 구단은 29일 밤 95명의 서울 지역 프로 희망 선수들을 대상으로 2대1 비율의 드래프트를 실시, MBC가 김재박 이해창 등 26명을, OB가 김우열 윤동균 등 20명과 신경식 등 연고지 선수 6명을 포함 26명을 선발했다. MBC가 확보한 김재박 이해창 등 국가대표 후보 선수는 대한야구협회와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1981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
MBC 청룡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백인천과 계약을 한 뒤 29일 서울 지역 고교 졸업 선수를 기준으로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당시 서울 연고지 팀은 MBC 청룡. 하지만 OB 베어스가 일단 대전으로 내려가기로 하면서 반대급부로 3년 후 서울로 올라온다는 조건과 서울 지역 선수를 놓고 MBC와 2대1 비율로 나누는 절충안에 합의했던 터였다. 당시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선수층이 얇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OB는 MBC 측에 “상위그룹 선수만은 1대1로 배정해 실력 평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MBC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MBC가 선수 2명을 먼저 뽑고, OB가 1명을 선택하는 식으로 2대1 비율로 드래프트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드래프트를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OB에서는 김영덕 감독하고 김성근 투수코치, 나 이렇게 3명이 코칭스태프였는데 아무래도 김영덕 감독, 김성근 코치는 재일교포라 문서 작업을 하는 게 서툴렀고, 구단 프런트라고 해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제가 사실상 1호 프런트 같은 역할까지 했죠. MBC가 김재박 이해창을 먼저 뽑고 OB가 박철순을 뽑았던 걸로 기억해요.”
원년 OB 베어스 타격코치로 선임된 이광환 전 LG 트윈스 감독의 말이다.

1981년 세밑에서 이뤄진 MBC 청룡과 OB 베어스의 서울 지역 2대1 드래프트는 향후 이들의 야구인생과 운명은 물론 KBO리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작용한다. 그때 MBC 청룡에 호명된 선수가 OB 베어스로 가고, OB 베어스에 지명된 선수가 MBC 청룡으로 갔다고 상상한다면 더욱 그렇다.
MBC는 28명을 뽑았고, OB는 충청지역 26명의 선수를 선발했다. 1981년 12월 30일자 신문 기사에 따르면 MBC 청룡에 드래프트된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투수 / 하기룡(상업은행), 이광권(한전), 유종겸(제일은행), 김시철(포항제철), 차준섭(롯데) 정순명(한국화장품), 이길환(연대), 김정호(한일은행)
포수 / 신언호(경리단), 유승안(한일은행), 김용운(한전), 최정기(롯데)
내야수 / 김재박(한국화장품), 김용달(한전), 정영기(한전), 이광은(성무), 박재천(성무), 김용윤(농협), 김인식(롯데)
외야수 / 이해창(롯데), 김봉기(롯데), 이종도(제일은행), 최정우(한전), 정혁진(포철), 유대성(포철), 이원녕(은퇴), 유제용(상업은행), 송영운(농협) 그러나 이들 중 프로행을 포기하거나 MBC 청룡과 계약협상이 결렬된 선수도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선수는 김재박(대광고 출신)과 이해창(선린상고 출신)이다. 이들은 특별한 케이스였다. 1982년 9월에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발탁돼 프로 진출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MBC는 가장 먼저 이들을 선택했다. 1년간 즉시전력으로 활용할 수 없었지만, 두 선수 모두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기량과 인기를 보유하고 있는 슈퍼스타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OB는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더블A 앨페소 디아블로스'에서 뛰고 있던 배명고 출신 박철순을 얻었다.
MBC 측에서는 박철순이 미국에서 어느 정도 활약하고 있는지 파악이 덜 됐지만, OB 측에서는 박용민 초대 단장이 1981년 가을에 메이저리그 선진 구단 운영 기법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박철순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래서 밀워키 측에 “박철순을 양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면서 이적 추진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MBC도 사실 우리가 박철순과 이미 얘기가 다 돼 있다는 걸 알았죠. 제가 MBC 쪽에 얘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거든요. MBC가 사실상 우리에게 박철순을 양보한 거죠.” 박용민 OB 베어스 초대 단장의 회상이다.

말하자면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 백인천을 감독 겸 선수로 영입한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 2명을 먼저 획득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그래서 OB 측에서 박철순을 데려가도록 순순히 양해를 해준 셈이었다. 이들은 훗날 두 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활약을 펼치게 된다.
OB 베어스에 이은 2호 창단식…‘역사적 출발’

OB 베어스가 1월 15일 가장 먼저 창단식을 하면서 KBO 역사상 최초의 프로야구팀으로 태어났다. 이어 MBC 청룡은 1월 26일 KBO 역사상 두 번째 창단식을 열었다.
12월 말에 진행된 서울 지역 드래프트에서 뽑은 선수 28명 중 1월 16일까지 22명과 계약을 끝냈다. 다만 공군야구단 성무에서 4월에 제대하는 이광은, 실업팀 롯데와 계약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김봉기는 창단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MBC 청룡 초대 주장을 맡은 이종도가 “페어플레이의 스포츠맨십을 발휘해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며 선서를 하자 MBC 인기탤런트와 코미디언들이 선수 22명의 목에 화환을 걸어주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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