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
개화와 개혁을 주장하다
김옥균을 두고 흔히 풍운아, 혁명가 또는 진보적 정치가, 개혁파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그의 삶과 행동을 두고 이렇게 다양하게 부르는 것은 그의 활동영역이 그만큼 폭넓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의 사상과 현실 인식을 살피기에 앞서 그의 삶과 주변의 정치세력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 정안의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시골의 양반 후예로 겨우 생활을 꾸려나가는 처지였다. 김옥균의 가계는 김상용(金尙容)을 중시조로 꼽는다. 김상용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했고, 우의정으로 있을 적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金尙憲)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청나라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파의 거두였다. 김상용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은 이조참의를 지냈지만 그 후예는 겨우 양반의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살았다. 이와 달리 김상헌의 후예는 문벌세도정치를 주도하여 서울에서 큰 세력을 잡고 흔들었다.
김옥균은 여섯 살 적에 종숙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서울에 와서 살았다. 김병태가 장자인 김옥균을 선뜻 양자로 내준 것은 살림이 쪼들리기도 해서였지만 김병기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므로 아들을 출세시켜보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김옥균이 열한 살 때에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도 강릉에 가서 살다가 열여섯 살에 돌아왔다.
김옥균은 스물둘에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이어 교리,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에 두루 등용되어 재질을 인정받고 명망을 얻었다. 그는 박규수의 제자로 입문하고 새로운 문물에 눈을 떴으며 개화파의 지도적 인물인 오경석, 유대치의 감화를 받기도 했다. 또 서른 살 이전에 중견 벼슬아치로 자리를 굳히고 조야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요직에 등용되면서 봉건제도의 모순과 외국세력의 침투에 눈을 떠서 개화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기화근사(箕和近事)》 등의 진보적 · 계몽적 내용을 담은 저술을 내놓기도 했다.
1881년 김옥균은 서른 살의 나이로 일본 시찰길을 떠났고, 이어 1882, 1883년 등 3차에 걸쳐 일본을 돌아보았다. 이때 그는 일본의 문물을 알아보기도 하고 그곳에 가 있는 신진인사들과 교유하기도 했으며 국가제도의 개선을 위해 차관을 끌어오기도 했다. 그동안 그는 교섭통상의 책임자, 동남아 제도의 개척사겸포경사(開拓使兼捕鯨使), 호조참의 등의 자리를 얻었다. 그는 나라의 부강을 위해 동해의 고래를 잡아야 한다고 역설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한성순보〉가 창간되자 〈치도약론(治道略論)〉을 발표해 도로의 개수, 위생시설과 제도의 개선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치도국과 우정국의 설치, 농사시험장 · 농업학교 · 순경부(巡警部) 등의 설치를 추진하여 제도의 개혁을 통해 개화정책 또는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려는 주장을 줄기차게 폈다.
그러나 수구파의 반대가 거셌고 봉건잔재를 불식하기에는 이런 온건한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을 계획한 것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그는 많은 세력을 끌어들였고, 일본군대의 지원까지 얻었으나 끝내 실패로 끝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은 형극의 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역부도죄인인 그를 죽이려 자객을 보냈고, 일본과 청국에서는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일본은 끝내 그의 활동을 꼬투리 잡아 도쿄에서 추방했고 이어 고도인 오가사와라 섬, 북해도 등지에 강제 이주되어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일본의 배신에 치를 떨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개혁세력의 지도자가 되다
이쯤에서 김옥균의 정치적 입지와 지향, 그리고 이론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김옥균은 벼슬살이를 하면서 폭넓은 교제 또는 교우관계를 가졌다. 그는 문벌 중심이나 세도가 중심의 당파성을 벗어나 넓은 계층의 인사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그를 지도하고 이끈 스승과 선배들이 있었다. 이는 박규수와 강위 그리고 유흥기, 오경석, 이동인이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였고 강위는 무관 집안에 태어난 시인으로 둘 다 개화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유흥기는 역관 집안에 태어나 의업에 종사하면서 불교에 조예가 있는 개화파였고, 오경석은 역관으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와 그곳의 양무운동의 경향을 소개한 인사였으며, 이동인은 중인 출신의 중으로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의 문물을 소개한 인물이었다. 김옥균은 이들에게서 개화사상 또는 서양 · 중국 · 일본의 선진문물을 소개받았고, 수표교 근처의 유흥기 약방을 드나들며 이런 학문에 눈을 떴다.
둘째는 벼슬살이하면서 만난 인사 또는 선배들로부터 소개받은 인사로서, 그 외 교우관계를 맺은 부류들이 있었다. 이들은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영효, 박영교,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서재필, 서재창, 지석영 등이다. 이들은 종래의 당파나 신분으로 따지면 대부분 노론계열이었고 중인도 더러 섞여 있지만, 선진관료 또는 ‘엘리트’의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들은 뜻을 같이하여 개화사상을 섭렵하고 외국정세를 토의하며 국내 수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때로는 수표교 유흥기의 초가집, 때로는 오경석의 사랑채, 때로는 탑골승방의 비밀집회소에서 모였다. 그리고 내밀히 군대의 양성, 조직의 확대를 꾀했고 드러나게는 제도의 개선, 세도인사의 탄핵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들은 일본 수신사나 중국 영선사에 집단으로 따라다니며 얻은 선진문물을 국내에 소개하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하나의 집단 또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굳히며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주도한 것이 김옥균이다. 김옥균이 이들의 지도자가 된 것은 벼슬자리가 높거나 나이가 많아서도 문중의 배경 때문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학문의 깊이, 개화사상에 대한 열정, 추진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갑신정변을 비롯, 강위 · 변수와 같은 사람들을 일본에 데려가 시찰 또는 교육시키는 일, 조직을 확대하는 일을 김옥균이 거의 주도했다.
비밀결사를 조직하다
김옥균 일파는 일대 정변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의 확대에 주력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이 비밀결사인 ‘충의계(忠義契)’의 조직이었다. 충의계는 물론 민간에 유행하는 계의 형식을 본받았지만, 종래의 비밀결사인 살주계(殺主契), 살략계(殺掠契) 그리고 변혁세력의 결집체인 폐사군단(廢四郡團, 평양 중심), 후서강단(後西江團, 서울 중심), 채단(彩團, 광대 중심), 유단(流團, 유리민 중심)에서 빌려온 것이기도 했다.
그 조직의 규모와 인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앞에 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계층을 묶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사, 중인, 천인, 보부상, 노비, 승려 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 하수인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중에 이희정(李喜定), 오창모(吳昌模) 등이 충의계에 들었다고 했다. 또 서광범의 노복인 이윤상(李允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9월부터(1884) 옥균, 영식, 영효, 광범, 재필들이 가끔 모임을 가졌는데 더러 유흥기의 집에서도 모였다. 그 뒤에 저를 불러 광범 집에 갔더니 승방(僧房, 탄골승방인 듯)에 갔다고 한다. 이틀 뒤에 광범이 집에 돌아왔다. 그 뒤 옥균의 집에 가는 길에 먼저 광범의 집에 갔더니, 광범이 저를 보고 우리가 세도(世道)를 뒤집어 엎겠다고 했다. 함께 옥균 집에 갔더니 재필, 영효가 여기에 있었다. 《추안급국안》
충의계원들은 일을 벌이면서 집회소를 옮겨 다녔고 또 여기에 많은 계층을 끌어넣었다. 하수인 이희정은 충의계에 들었지만 “그 규약이나 조직은 보지 못했고 나라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만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상(負商) 통령인 이창규(李昌圭), 화계사 승려인 차홍식(車弘植), 노복인 이현돌(李顯乭), 김봉균(金奉均) 등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김옥균 등이 일본에 드나들며 일본어 어학수업을 받게 하거나 사관학교에서 공부시킨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더러는 신분에 관계없이 의형제를 맺어 동맹결사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종래 갑신정변 등 이들의 변혁운동이 지배 엘리트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그 일면만을 본 견해일 것이다.
김옥균의 벗들과 충의계 계원들이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계층은 앞에서 알아본 대로 아주 다양했다. 충의계야말로 하나의 비밀결사를 통해 정치세력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끝으로 김옥균의 교제인사로 일본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하에 드나들 때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익혔고, 고토 쇼지로(後藤象次郞) 등의 신진인사, 도쿄 진정사의 승려 데라다(寺田福壽)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들 일본인 모두 그를 후원했거나 추종했다. 일본인들이 그를 이용했는지 그가 일본인을 이용했는지, 이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연구검토가 필요하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다
김옥균을 두고 흔히 초기개화파 또는 급진개화파라고 부른다. 이는 뒤의 온건개화파와 구분해서 붙여진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은 꾸준히 정치개혁을 도모했고 끝내 혁명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들이 추진한 방향을 두고 부르주아 혁명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급격한 정치개혁 노선을 지향했다고도 한다.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향은 첫째로 자주독립을 꼽는다. 김옥균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어느 나라를 따질 것 없이 독립한 연후에야 화친할 수 있는데 조선이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이 어느 때에 독립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동열(同列)에 서겠는가? 〈신중환 공초〉, 《추안급국안》
이 말은 곧 우리가 완전독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 전통적 외교노선인 사대교린정책을 불식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명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개항 이후 청나라는 조선과의 전통적 외교관계를 들어 마치 속국처럼 다루고, 외교 · 통상조약에서 먼저 자국과의 교섭 또는 허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이것이 바로 자주적으로 서양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또 임오군란 이후 청국상인이 조선에 진출하고, 흥선대원군이 톈진에 구류되는가 하면 이홍장의 막하 오장경(吳長慶)이 서울에 주둔하면서 군문제독(軍門提督)이라는 이름으로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진행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항 이후 일본,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의 교섭에서 조선은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옥균은 전통적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청국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여 새로운 국제 시대에 조선이 내정 · 외교에서 철저한 자주노선을 수립할 것을 역설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애국주의와 부국강병을 지향했다. 이것이 확립되지 않으면 외래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자주독립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김옥균이 지향한 정체(政體)는 〈한성순보〉의 논설 〈구미입헌정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3권 분립과 양원제를 주축으로 한 의회제도, 이를 토대로 한 입헌군주제 아래에서의 국왕의 위치와 정부의 역할 등을 소개했다. 이는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입헌군주정치를 지향해야 할 필요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한편 황현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대통령제처럼 번갈아가며 그들이 군장이 되려 했다고 쓰고 있다.(황현 《오하기문》)
한마디로 김옥균이 입헌군주제와 대통령제,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봉건군주제도를 타파하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저 위에서 봉건제도의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다.
김옥균은 봉건신분제인 양반제의 폐지를 열렬히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양반제가 존재하는 한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이와 함께 초기개화파들은 문벌의 타파를 추진했다. 세도정치 또는 족벌정치의 온상인 문벌의 타파가 선행되어야 양반제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관료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행정기구의 개폐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오군란 뒤 그들이 만든 기구인 기무처(機務處)에 이런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궁중예산제도를 확립하여, 왕궁에서 사사로이 무한정 쓰는 경비를 한정하게 했고, 국가재정수입을 호조의 단일 기구에서만 관장하도록 했으며 근대적 군사제도의 실시를 추진했다. 그밖에 그들은 풍속의 변화를 꾀했다. 그 중에서 복제의 개선, 색의(色衣)의 장려와 단발의 시행을 가장 중시했다. 이들은 벼슬아치들에게 도포나 장식이 많은 관복을 고쳐 두루마기로 통일시켰으며 일반 백성에게는 색의를 권장했다. 이는 실질 있는 풍속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의 설치, 통신제도의 개선, 기예의 장려 등을 도모했다. 그들은 종래의 역마제(驛馬制, 역을 기준으로 한 파발)를 바꾸어 우정국을 설치했고, 전보를 보급하기 위해 전선국을 설치했으며, 각지에 어학학교 · 기예학교 등을 두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일본 · 중국에 파견하여 어학 과 기술을 익히게 했고, 근대적 출판 · 언론을 보급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개혁과 풍속 · 문화운동은 단순한 개량의 수준이 아니었다. 비록 실학자의 주장을 수용한 면도 있고 선진문물의 영향을 입은 바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근대지향이라는 면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런 근대지향성은 번번이 수구파에 의해, 특히 복제개선 등에서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수가 흔했다.1895년에 전면적으로 단행된 ‘단발의 실시’를 놓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사례를 보아도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로부터의 혁명을 단행하다
이와 같은 개혁 외에 김옥균 등이 강하게 주장하고 추진한 것은 경제의 근대적 지향이었다. 이는 김옥균이 직접 쓴 《치도약론(治道略論)》과 〈회사설(會社說)〉에 잘 나타나 있다.
김옥균은 치도국이 설립되어 박영호가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에 그 중요성을 지적하고 17조를 적어 그 시행의 요체를 일러주었다. 박영효는 길을 닦는 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로가 닦이면 우마를 이용할 것이다. 이에 열 장정이 짐을 지는 일을 한 장정이 해낼 것이다. 그 나머지 아홉 장정은 공작(工作), 기예로 돌릴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예전 놀고먹던 무리들이 각각 생업을 얻게 될 것이니 편국이민(便國利民)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도로의 개수는 위생, 농상, 도로라는 3가지 난제를 함께 해결하게 한다고 했다. 곧 도로에 널려 있는 분뇨 등을 치워 농사에 돌리면 역질을 막고 농업의 거름이 되며 운수의 확장으로 국가의 조세를 원활히 실어 나르고 유통구조의 개선으로 상업이 장려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①기술자의 동원 ②하수구의 설치 ③분뇨를 사서 저장하는 것 ④인력거의 보급 ⑤이를 감독하는 순검소의 설치 ⑥땔감 파는 곳 따위 통행에 방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빈곳을 마련해줄 것 등을 들었다. 그 뒤 실제로 치도국에서는 종로와 동대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 정리했고 이후 위생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
〈회사설〉의 내용은 주식회사를 설립,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적 근대국가를 지향하고 또 이것이 부국강병의 한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한성순보〉에 발표되어 큰 호응과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신이 1883년 외무아무교섭통상사무의 참의라는 책임을 맡고는 서울 상인의 자본을 동원하여 장통상회(長通商會), 평양 상인의 자본을 동원하여 대동상회(大同商會)를 설립하게 했다.
또 객주, 시전상인 등의 자본을 권련국(券煙局, 담배), 양춘국(釀春局, 술), 두병국(豆餠局, 떡) 등의 회사설립 자금으로 전환했다. 그는 보부상을 그의 하부조직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을 근대 상인 또는 기업인으로 키우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것은 전용 시전을 근대적 자본가로 성장하게 하고 사상인 객주를 민족자본가로 키우려는 구도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이 밖에도 그는 광산개발로 금 · 은 · 석탄 · 철을 대량생산하고 윤선(輪船)을 이용하여 통상을 도모하고 공장 · 기계 등으로 산업을 개발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그의 경제적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서양을 모델로 한 것이요, 이를 먼저 개발한 일본 · 중국의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원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근대적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민족자본을 형성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혁명가의 삶을 살다
그렇다면 김옥균은 봉건사회에서 가장 큰 모순으로 지적되었던 농민문제를 어떻게 보았는가?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에 발표한 14개조의 개혁방안 중에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온 나라의 조세 거두는 법을 고쳐 간리(奸吏)를 막고 민곤(民困)을 구제하여 이와 함께 국가의 용도를 넉넉하게 할 것이요, 또 하나는 각도의 환상(還上, 환곡의 이자수입)을 영구히 탕감하는 일이었다.
이는 봉건적 경제정책의 골간을 이루는 삼정 중 두 가지를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토지에 대한 국가조세를 공평히 하고, 국가적 수탈의 한 방법 또는 고리대이자 부정의 온상이었던 환곡의 빚을 탕감한다는 것이다. 1862년 삼남농민봉기 이후, 삼정은 농민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고 봉기의 원인이 되어왔다. 위의 정령에서 구체적 실시방안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문제에 대해 김옥균은 철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국가적 수탈로 변한 지조는 봉건제하의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그런데도 획기적 개혁을 하지 않고 ‘간리를 막는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또 대지주에 의한 지대의 가중은 지세보다도 더 큰 고통을 농민에게 안겨주었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방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로 김옥균도 개혁의 주체를 지배 엘리트 중심 또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맞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봉건제 아래에서 가장 큰 모순의 담지자였던 농민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상공업을 통한 부국강병에 기조를 두었던 것이다. 이런 개혁방향은 후기개화파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곧 후기개화파의 개혁 내용을 보면 지주를 국가재정의 부담자로 지목하고 옹호했던 것이다.
이상이 김옥균이 주도했던 개혁의 요점이다. 이는 1884년 이전 김옥균의 활동기에 나타난 문제들이다. 그는 꾸준히 개혁을 도모한 끝에 갑신정변을 통해 부르주아 혁명을 단행하려 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어찌됐든 그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자주독립과 근대국가를 지향했다는 점 또한 선구적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지향이 토지문제, 농민문제 등에서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후기 개화파들이 친일파로 변신한 탓으로 그 비난이 김옥균에게 튄 점도 없지 않았다. 김옥균은 그런 꼴을 보지 않고 먼저 갔으니 이를 두고 행운이라 할 수 있을까?
김옥균의 삶과 행동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혁명가다운 삶을 살았다. 어쨌든 그의 생애 마지막은 너무나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일본에서 푸대접을 받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894년 2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조선침략의 음모를 진행하고 청나라는 조선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 국내에는 민씨들이 더욱 세도를 부리는 속에 동학농민전쟁의 전초인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주시하며 김옥균은 10년 만에 일본을 떠나 접근해온 홍종우를 데리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민씨들이 보낸 자객 홍종우는 상하이 미국조계에 있는 여관인 동화양행의 객실에서 그에게 권총을 겨누고 쏘아 죽였다. 마흔네 살의 짧은 생애였다.
민씨 정부는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그의 시체를 인수해서 양화진에서 효수하여 조리를 돌렸다. 역적의 응징을 민중에게 알리려는 전통적 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의 시체는 양화진 언저리에 나뒹굴었다. 그를 추종하던 일인 가이(甲斐) 부부가 시신 일부를 거두어 도쿄 진정사에 매장했다(그의 묘는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 있다). 그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이처럼 우상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그는 대역부도죄로 역적의 누명을 썼지만, 1895년 개화정부에서 역적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이는 일본의 입김으로 복권된 것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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