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독립도 못했는데 어떻게 독립국가를 일굴까.
고종은 1863년 12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었지만 30년 넘게 왕 노릇을 못 했다. 10년은 아버지의 꼭두각시였고, 20여년은 아내의 치마폭에 싸였다. 나라는 외세의 침략 속에 기울어 갔지만, 군주는 자신의 뜻을 갈고 닦지 못했다. ‘독립(獨立)’은 스스로 일어서는 일이건만, 그가 자꾸만 외세에 의존하려 한 이유다.
구한말 시대극에서 고종은 뜨거운 감자다. 극단적으로 애증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임금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비판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간악한 일제에 맞서 왕으로서 할 만큼 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 고종 황제가 미국 선교사에게 밀서를 내리고, 내탕금을 빼돌려 일본에 맞서려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몸부림을 쳤다. ‘조선의 마지막 승부사’니, ‘알고 보면 개혁군주’니 하는 호의적인 평가들도 이런 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을 한 달여 앞두고 고종은 미국에 밀서를 띄웠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국권침해 문제를 중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에 체결된 바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3년 전에 덕담 차원으로 넣은 조항을 들먹이다니….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한국의 처지를 헤아려보면 터무니없는 소망이었다. 노력은 가상하다고 치더라도 현실감각이 너무 떨어졌다.
“서울의 길거리 청소는 견공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가 먹어치우니 길의 청결 여부는 견공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감사의 표시로 개를 먹는다.”
20세기 초 한국 땅을 밟은 어느 독일인의 소회다. 대소변이 길거리에 널린 미개한 나라, 전쟁 나면 도망치기 바쁜 나태한 민족. 이것이 한국, 한국인을 바라보는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우르르 몰려온 서양의 종군기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 ‘강철군화’를 쓴 미국 작가 잭 런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인에게는 기개가 없다. 일본인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주는 맹렬함이 없다. 한국인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의지와 진취성이 가장 부족한 비능률적인 민족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한국은 일본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보호지 사실상 지배다. 전형적인 제국주의 논리! 억지를 부려 구제불능 낙인을 찍고, 공론으로 부풀려 국권을 강탈한다. 영국이 인도를,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할 때 쓴 수법이기도 하다.
이런 잣대를 노골적으로 들이댄 인물이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동양이 평화로울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뒤로는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영유를 양해 받았으니 어차피 장삿속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미국의 도움이 컸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앤드류 카네기, J. P. 모건 같은 자본가들이 일본에 차관을 제공하도록 주선했다. 무려 7억 엔(현재 가치 14조원 상당)의 거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원래 전쟁도 돈으로 치르는 법이다. 작은 나라 일본이 거대 제국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만주를 공략해 여순과 봉천을 점령했고, 대한해협에서는 지구를 돌아온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과정에서 국고가 바닥나며 위기에 봉착했지만 미국의 차관 덕분에 꾸역꾸역 전쟁을 이어나갔다. 레닌 등 혁명세력을 지원해 러시아 황제의 발목을 잡은 것도 바로 자금의 힘이었다.
1905년 9월 5일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중국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고 한국의 지배권까지 인정받았다. 남의 나라에서 멋대로 싸우고 남의 땅을 맘대로 나눠가진 셈이다. 약소국은 독립국이 아니라 단지 전리품이었을 뿐이다.
고종 황제가 미국에 밀서를 보낸 것은 그 직후로 을사늑약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이 일을 주관한 인물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였다. 그는 선교사 출신으로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고종의 신임을 얻어 측근이 되었다.
헐버트는 밀서를 서울 미국공사관의 외교 행낭에 넣어 워싱턴까지 날랐다.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심하고 애썼는지 알 수 있다. 본인도 미국에 건너가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는 냉랭했다.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행되었고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오히려 새로 외부대신 임시서리가 된 이완용의 요구에 따라 주미 한국공사관의 재산과 서류를 일본에 넘기는 데 협조했다.
헐버트가 헛물을 켜고 돌아왔지만 고종 황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을사늑약은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에 무효라며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것이다. 그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황제가 내탕금 증서를 상해로 보낸 것도 실은 이 사건과 관련이 깊다.
1907년 4월 고종에게서 국새와 수결이 찍힌 위임장을 받고 이준이 비밀리에 서울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해 헤이그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이때 이준에게 위임장을 전달하고 별도의 경로로 헤이그까지 간 또 한 명의 밀사가 있었다. 황제의 특명을 받은 미국인 측근 헐버트였다.
헐버트는 중도에 상해에 들렀는데 여기서 거금을 노중은행에 예치했다는 설이 있다. 고종 황제의 개인 자금인 내탕금을 빼돌려 독립운동에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해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이후 러시아 측에 여러 차례 망명을 언급했다. 태황제(太皇帝)로서 해외 비밀자금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돈과 관련해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준의 비통한 죽음을 뒤로 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1910년 이상설은 연해주와 간도의 항일 의병들을 설득해 십삼도의군을 조직하는데 이때 고종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두 가지 청을 했다고 한다. 첫째 고종이 망명할 것, 둘째 내탕금을 군자금으로 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밀사 헐버트와의 교감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한편 헐버트는 1910년 일제에게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39년 후인 1949년 7월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헐버트는 내한 일주일 만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대한민국은 호머 헐버트 박사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그가 묻힌 곳은 서울 마포의 양화진외국인묘지다. ‘한국의 친구’라는 묘비명과 함께 ‘고종의 비밀자금’을 수수께끼로 남기고 영면한 것이다.
2018.8.25 월간중앙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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