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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바위 호신발 행사

일 시 : 2010년 5월 9일 장 소 : 대전시 동구 비룡동 신선바위 판암IC를 지나 국도4호선 옥천로를 따라 동신고등학교 앞을 막 지나 비룡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대청호수로에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 신상로로 이름이 바뀐 폐경부고속도로 비룡교차로 굴다리를 지나면 얕은 고개마루 우측에 신선봉 유적지를 가리키는 오렌지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곳, 산 정상 조금 아래에 역시 ‘신선봉유적지(기념물 제32호)’로 표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소롯길에도 휴식할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고, 대청호 오백리길임을 알리는 표지들도 부착되어 있다. 과거에 이곳을 찾느라 헤맸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정상을 오르니 신선바위가 우리를 반기듯 했다. 산..

잣뒤에서 성재를 넘어 학교뒷재로 내려서다

언 제:2014.3.17(월) 어디로:대전 유성구 성북동 신뜸-봉덕사-대둘10구간 능선-범바위-되돌아 용바위-성재-성북동산성-매산바위-학교뒷재 누구와:나홀로 서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성북동행 41번 외곽버스를 타고 봉덕사 입구 신뜸 정류장에 내리니 봄볓이 아주 따스하다. 고즈녘한 마을앞을 지나는 성북로 154번길을 따라가다가 돌간판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되돌아 본 신뜸마을과 건너편 관암지맥 백운봉에서 뻗어 내린 홀목재 능선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인 석조보살입상 (石造菩薩立像)이 있는 유성구 성북동 산11 봉덕사에 닿는다. 석조보살입상 (石造菩薩立像) *지정일:1989.3.18 *분류:유물 / 불교조각/ 석조/ 보살상 *시대:고려시대 성북동 산뜸 마을 동북쪽 산중턱에 있는 봉덕사(옛이름 ..

구 경부선 철길 세천터널과 마달터널을 다시 찾아서

언 제:2010.11.23(화) 어디로:세천양조장-세천터널-대전시계-마달령-증약-마달령-마달터널-회남길 삼거리 누구와:나홀로 얼마나:너무 많이 뺑뺑이 돌아서 거리 계산은 할수없고 5시간 20분 동안 구석 구석을 뒤지며 널널하게 607번에 올라 날개를 접고 세천동에 내려 시경계 산행길에 항상 들리는 흥덕수퍼앞 느티나무 노천카페를 살펴보고 세천 저수지에서 쇠정골을 거쳐 흘러 내려온 주원천 다리 위에서 철탑 능선 안부 바로밑에 자리잡은 세천터널을 찾아 세천양조장이라 불리는 동일양조장 앞을 지난다. 골목 끝 철로 옹벽 아래서 좌측으로 접어들면 정면으로 코레일의 전기분소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세천 장계울마을 뒤로 저멀리 계족산성이 손짓한다. 세천역쪽을 돌아보며 세천고개를 넘어가는 국도 4호선을 뒤로하고 전기분소 앞..

사라져 가는것들 / 대전역 동광장과 대동천변에서

언 제: 2010.10.29(목) 어디로: 동구 대동천변에서 누구와: 나홀로 산성축제 뒷정리를 마치고 오는길에 대전역 동광장의 자재창고에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어 불안한 마음에 찾아가 보았다. 가제교를 둘러보고 가양천 합류지점의 쉼터에서 구름과자 한모금하니 삼성연립 옆의 아주 옛스런 2층집이 정겹다. 철갑교 동편의 장승도 둘러보고 대전역 동광장에 다다르니 철거공사가 한창인데 다행이도 등록문화재168호인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 보급창고는 온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뜯어지는 저 건물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수 없고 물끄럼이 내려다 보는 쌍둥이빌딩도 분명 아쉬움을 느끼리라. 대동교 동편 대흥로와 대동복개길 삼거리에서 대신휴먼시아 아파트 진입로로 바뀐 대동천우안길에 들어서니 신안동 장승을 주택공사에서 담..

대흥동 뾰족집 홰손에 따른 성명서

성 명 서 대흥동 뾰족집 원상회복과 훼손 책임자를 고발 조치하라. 최근 대전 대흥동 뾰족집을 대흥1구역 재개발 조합이 문화재 이전과 관련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건물의 뼈대만 남기고 철거한 행위로 문화재가 심각하게 훼손된 일이 발생하였다. 대전 대흥동 뾰족집은 문화재청이 2008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7호로 등록하였고, 2009년 10월에는 대전시가 문화재자료로 가지정한 대전의 대표적 근대건축물이다. 문화재보호법 3조에서는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문화재 보존의 기본이 원형 유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중구청과 대전시가 대흥동 뾰족집의 보존과 적법한 이전을 추진하는데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따져 묻..

구 경부선 철길 세천터널과 마달터널을 찾아서

언 제:2010.10.30(토) 어디로: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마달령-제1터널-SK저유소-원새천-제2터널-옛 채석장(국궁장)-새천양조장 얼마나:약 5km를 2시간 동안 누구와:왕눈이와 함께 지난 6월 말 쯤 바깥아감에서 안아감으로 들어가 시경계를 넘어 비야골로 내려서서 72번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감로마을을 지나 증약까지 나온일이 있다. 그때 증약 마을 동네수퍼에서 맥주로 목을 축일 때 촌로 한분과 예기를 나누다 우연히 토굴 새우젓 예기로 넘어가니 이곳에도 새우젓을 보관하는 굴이 있다는 예기를 듣고 낙옆이 지기를 손꼽아 기다리다 오늘에야 길을 나선다. 607번 옥천행 버스를 타고 증약정류장에 내려 굴다리를 지나서 있는 군북양조장에서 증약막걸리 2병을 베낭에 챙겨넣고 동네수퍼에 가서 물어보니 그 노인네가..

효를 담은 정원 / 유회당 원림(有懷堂 園林)

오늘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통계조사에 따르면 연로하신 부모를 집에서 모시지 않는 것이 불효라 생각하는 사람은 10명 중 2명에 불과했다. 과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며 효를 주요 덕목으로 여겼던 선조들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중국의『효경(孝經)』에는 늘 부모의 마음을 살피고, 공경하며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을 효도의 으뜸으로 삼았다. 선조들 또한 효를 실천하는 일상은 물론이거니와 시와 글로써 효심을 담기도 했다.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정원에 녹아들기도 했는데, 우리 대전에도 무수동에 효심 지극한 선비가 그 마음을 담아 만든 정원이 전해진다. 바로 유회당 원림(園林 / 집터에 딸린 수풀)이다. 조선후기 문신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은 명대 문인의 시(詩) 중..

앞치마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한밭벌을 남에서 북으로 세로질러 '버드내'와 '으뜸내'에 섞여 '비단강'으로 흘러드는 '대전천' 中流, 보문교와 문창교 사이의 '대전천西路'에 '살구꽃'이 만발한 3월의 어느 '불타는 금요일' 오후 지난 2월 말에 동구 소재동에서 중구 대흥동으로 옮긴 (사)대전문화유산울림의 사무실 정리를 하고있는데 경북 구미에서부터 40년 넘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어디서 뭐해?.” 소주 한 잔 마시자는 뜻이다. 30분 전에 보낸 카톡을 늦게 보았으니 바로 다이얼을 눌렀다. “왜 이제 전화 해?.” 귀가 찢어진다. 사정을 설명하고 살구꽃 향기를 맡으며 소주 잔을 기울일 곳에서 6시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대충 정리를 끝낸 뒤 15년을 함께 한밭벌을 누벼온 자전거를 타고 약속장소에 닿으니 ..

大淸湖에는 龍이 살고있다

대청호는 단순한 인공호수가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이었고,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비단강 줄기를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문물을 옮길수 있었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전략에 의해 수 많은 山城들을 주변 산봉우리에 쌓았고, 수 많은 전투를 치루며 군사들이 진을 쳤던 자리가 '진터벌'이란 이름으로 물속 여러곳에 존재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풍수지리학적 명당으로 손꼽히면서 사림 세력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75년 3월에 착공하여 1980년 12월에 준공한 대청댐이 1979년 물을 담기 시작하여 커다란 호수가 생기기 전 부터, 아니 더 먼 옛날 부터 마을 이름에는 호수가 생길것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대전 대덕구의 渼湖洞, 龍湖洞, 黃湖洞, 동구의 舟村洞 ..

비오는 오후, 추억에 젖어 든다

나어릴적 배고픈 시절엔 비오는 오후가 아주 좋았다 맑은 날의 바쁜 일상이 비오는날 만큼은 해방 되었으니까 * * * 국민학교든 중학교든 청소당번까지 마치고 부모 형제 모두 들일 나가시고 아무도 계시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면 실겅위 삼배 보자기 덮힌 삶은보리쌀 소쿠리를 내려 한 귀퉁이에 담겨있는 식은밥을 양푼에다 담고 차디찬 우물 물 한바가지 퍼 담아 말고 마당 한켠 채전밭에서 풋고추 한웅큼 따고 장독대에서 제일 커 내 작은 키를 얕보는 된장독에서 어렵사리 한숱갈 퍼내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시장끼를 떼우기 바쁘게 찬도랑 방천둑에서 쇠파리때 쫏느라 꼬리 흔들기 쉴틈이 없는 누렁이 고삐를 풀어 몰고 옆집 점태도 앞집 상식이형도 황보네 순덕이 누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뒷산 기슭으로 꼴망태를 매고 간다. 모갈비얄..

2008년 광복절 아침 생각

63주년 광복절과 89주년 건국절 올 2008년 광복절은 음력 칠월보름으로 우리민족의 전래명절인 백중절이다 요즘 이명박 정부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명칭을 바꿀 요량인듯하다 일제강점기 36년을 벗어나 1945년에 광복을 맞으니 올해로 63주년이 된다 건국은 단군신화를 차용하지 않드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 독립국임을 온 세계에 선포한 1919년이 엄연히 현행 헌법 전문에 존재한다 당연히 건국절은 선포일인 4월13일이나 여섯곳으로 흩어져 있든 각각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이승만 박사를 초대 내각수반(후일 대통령제로 개헌)으로 선출하여 온세계에 선포한 9월15일이어야 하고 올해가 건국 89주년임을 절대 부인할수는 없는일이다 만일 오늘을 건국 60주년 기념일로 할려면 헌법을 개정하고 전문의 내용을 수정한후..

보문산의 추억

대전둘레산길에 취하여 원거리 산행을 잊은지 벌써 여러해, 한달에 두어번 산악회를 따라 다녀 오기는 하여도 예전에 비하면 鳥足之血인데 월요일 하루를 쉬고 모처럼 집 뒤의 보문산에 올라봤다. 대전의 명산이랄수 있는 보문산 오르는 길은 무척이나 많다. 대충 헤아려 봐도 160여개가 넘는데 그것도 100m 이내의 옆길이나 200m이내에서 합쳐지는 길을 빼드라도 그 정도다. 보문산은 산자락의 범위도 상당히 넓어, 북쪽기슭의 문화동에서 시계방향으로 대사동, 부사동, 석교동, 호동을 지나 옥계동 학고개를 넘어서면 동구의 이사동으로 이어지고, 오도산 아래의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구완터널 위 원앙고개를 넘어서면 다시 중구의 구완동, 무수동, 사정동, 산성동으로 이어지니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시루봉 또는 보문산성을 향하..

느낌표님의 "바위구멍여행기" 발간 축하글

느낌표님에게 요즘도 더운 날씨에 여전히 산천을 해매시고 다니시나요? 그렇게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도록 쉬는 날이면 빠짐없이 산과 들을 해매고 다니시니 뒷바라지를 하는 아주머니 생각도 하시어 가족과의 시간도 많이 가지시고 당신의 건강도 좀 챙기셔야지요. 당신의 소싯적 이력이야 잘 모르지만 최근 10여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오늘 충고 아닌 부탁의 말씀 한번 해볼까 합니다. 당신께서 백두대간과 정맥 길을 비롯해 전국 유명산을 오르내리기가 몇 번 인데, 10여 년 전 부터는 한밭 벌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에 미쳐 “대전둘레산길” 개척에 일조 하더니만 어느새 대전시 경계 길을 지나 충남도계길, 각 시,군 둘레 길도 모자라 유성, 세종 올레길, 연구단지 사이언스 길까지 섭렵하시다가 급기야 이제는 “바위..

어느 치사한 녀석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2014년의 중복날, 한밭벌 서정리의 어느 '산꾼방' 앞에 땀에 젖은 세 사내가 나타나자 망을 보고 있던 녀석이 낮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 반가워 하는데, 그중 한 사내가 산꾼방의 주인인듯 "백구야" 하며 손까지 흔들며 등짐을 내리지만 녀석은 전혀 관심없이 다른 사내를 보고 오히려 펄쩍뛰기 까지 하며 좋아하니, 또 다른 한 사내도 "야 너 오늘 왜 그러냐"고 나무라지만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사내만 반가워 한다. 그 사내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있고 사내가 봉지속의 무엇을 꺼내어 녀석의 밥그릇에 부어 주니 뒤도 돌아보지않고 개걸스럽게 침까지 흘리며 아구창 상하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주인사내의 일갈이 "야! 임마!" 하며 녀석의 귓전을 때리지만 녀석은 한번 돌아보..

그 때, 그 시절, 그 모습, 그 목소리

그리운 승리부대 사령부 전우들에게 옛날 우리의 선배 전우들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든가요? 군대는 짬빵순이라고... 허지만 우리 승리부대 사령부의 전우들은 짬빵순 만은 아니었죠. 힘든 내무반 생활과 항상 긴장속에 빠듯한 시간을 쪼개야 하는 상황실 근무를 하다 보면 군인으로서 목메이게 기다리든 식사시간 마저 놓쳐 버리고 할수없이 취사반장의 눈치를 보며 대형 가마솥의 누룽지라도 긇어 배를 채우면서도 서로를 다독여 주던 바로 그것, 사단사령부 근무자의 끗빨이자 자긍심이며 끈끈한 전우애였죠. 쏟아져 나온 월남병장때문에 T/O가 모자라 병장 계급장 달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진급심사라는 미명으로 치뤄야 하던 10km구보도 힘들었지만 즐거웠었고, 1년에 한번은 꼭 다녀와야 하는 유격훈련을 가기 위해 군장을 꾸리던 날 저..

월간 교양지 "샘터"의 지령 500호를 축하하며

60년대 말 삼선개헌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등학교를 못다 마치고 생활전선에서 노심초사 하던 시절, 퇴근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구역전 선술집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기울이다 비몽사몽 간에 통근열차를 타고 고향땅 왜관역에 내려 땅거미 진 역광장을 지나 중앙약국 앞에 서면, 구장터 쪽, 신동관 못미쳐 왜관제과 건너편 처마밑에 발그래 한 백열등이 빛나고 있었으니 만화,소설,잡지를 빌려주던 만화방 불빛이었다. 허문영, 방인근의 이름을 도용한 삼류작가의 야한소설이나 김충의 무협소설을 빌려와 자정 넘어서까지 탐독하기도 하고 한달에 한번씩 발행되던 명랑, 아리랑, 영화잡지, 야담과 실화등 대중잡지를 빌려보기도 하였으나 선데이서울을 필두로 쏟아져 나온 주간한국, 주간경향등 주간지가 한가운데의 두 페이지 짜리 여배우의 야한 ..

낙동강 칠백리

매년 4월이면 내고향 뒷동산 작오산에는 참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참꽃은 양지쪽 묘지의 잔디밭에 돋아난 삐삐와 함께 어린 우리들의 간식거리로도 훌륭하였었는데 보리고개를 넘느라 굶주린 배를 채우기 보다는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갈구를 달래기위해 꽃잎은 마냥 우리들의 입술을 붉게 물들였었다. 겨우네 찬도랑 옆 배방골 논바닥의 얼음판을 지치든 손과 발이 우수,경칩을 지나면서 물 웅덩이를 찾아 해매었고, 춘분과 청명을 지나며 뒷동산으로 돌린 발걸음은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목얄비알에서 짠디도 케먹고 찔레도 꺽어 먹으며 봄을 맞았었다. 어린 나이에 형들의 뒤를 무작정 쫒아 오르다 사춘기가 지나며 사타구니에 검 덤불이 돋아 난 후에야 그 붉디 붉은 진달래가 6.25사변의 와중에 낙동강 전선에서 흘린 피아..

1.4후퇴 흥남철수가 영화로 만들어 진다고?

굳 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해매였드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 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떳다 철의 장막 모진 설음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 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 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 보자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받은 가수 현인(1919.12.14~2002.4.13)이 1953년에 발표한 강사랑 작사/박시춘 작곡의 노래로 발표한지 58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의해 자주 불리는 국민 가요로 돌까마귀도 노래방..

2010년을 보내며

산길을 걸으면서는 언제나 행복했었다, 탁배기나 소주 한병 그리고 따뜻한 물 한병, 마음의 점을 찍을 쌀국수 하나 달랑 넣은 베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발걸음은 구름속을 걸었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한적한 마을앞에 내려서면 산은 항상 내 코 앞에서 반겨 주었었다, 때로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함께, 때로는 바삭거리는 낙옆과 함께, 때로는 뽀드득 거리는 하얀 눈과 함께... 간혹 찬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귀때기를 때려도 산길에 들어서는 순간 산은 바로 포근한 안가슴을 내어주며 보듬어 주었었다, 어쩌면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항상 거기 그곳에 있었다. 내가 산에 빠져 들게 된것은 코 흘리게 어린 시절 고향 마을 뒷산에 널부러진 탄피와 포탄 파편을 주으러 동네 형들 뒤를 쫒아 다닌게 시작이다, 인..

한여름 날의 보문산자락(보문산의 추억/원문)

대전둘레산길에 취하여 원거리 산행을 잊은지 벌써 여러해, 한달에 두어번씩 산악회를 따라 다녀오기는 하여도 예전에 비하면 鳥足之血인데 월요일 하루를 쉬고 모처럼 집뒤의 보문산에 올라봤다. 대전의 명산이랄수 있는 보문산 오르는 길은 무척이나 많다, 대충 헤아려봐도 160여개가 넘는다, 그것도 100m 이내의 옆길이나 200m이내에서 합쳐지는 길을 빼드라도 그정도이니, 보문산 북쪽기슭 문화동에서 시계방향으로 대사동,부사동,석교동,호동,옥계동,학고개 넘어 동구의 이사동,오도산 아래 구완터널 위 원앙고개를 넘어서면 다시 중구의 구완동,무수동,사정동,산성동,동서남북 어디서나 시루봉이나 산성을 향하여 오르면 바로 산길과 연결된다. 한 두시간이면 정상에 다녀올수 있는길도 있고 6시간이상 걸리는 길도 더러있다, 대전에 ..

2009년을 보내며

돌이켜 보건대 2009년은 나름대로 보람있게 보낸 한해였다. 첫번째가 개인적으로 과년한 딸년을 시집 보내므로써 남매뿐인 자식들이 모두행복한 가정을 꾸린 일이요, 두번째가 한해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기에 예쁜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놈을 안겨준일이다. 사업적으로는 별 소득이 없었지만 세번째는 아주 큰 성취감을 안겨준 대전둘레산길잇기의 안내대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기적인 생각이 없는것도 아니어서 첫번째 보람으로는 뽑지 않었어도 나에게는 아주 크나큰 행복이었는데 아주 많은, 좋은사람들을 만나 너무나 좋은 기억들만 머리속에 가득하다. 때로는 독선과 아집속에서 자아도취에 흐느적 거린점도 많았지만 2008년에 시작한 대청호반산길따라가 8개구간으로 확정되어 대전시에서 관광상품으로 개발계획을 착수한 일이며 아우라지님의 조언..

첫눈 내리는 보문산성을 오르며

가을이 서서히 기울어 가는 어느날 아침 일요일이라 한적한 한밭골의 어느 낭자훈육소 큰문 앞에는 스무나문명의 남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갖춰입고 등에는 개나리 봇짐을 하나씩 메었는데 어떤이는 쌍지팡이를 짚었고, 어떤이는 외지팡이를 짚었는데, 간혹 목에다 요상한 쇳덩어리를 매달은 사람도 있는것이 때지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듯, 빙 둘러서서 왕초 인듯한 사내의 예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둘러 볼 물건은 다섯개 인대 그중 두개는 너무 크고 무거우며 한개는 너무 오똑한 곳에 얹혀 있어 가져오기가 힘들다. 나머지 두개 중 한개는 대여섯명이 들면 될듯하고 한개는 큰돌에 붙어 있으나 여럿이서 때어내면 될듯하고 작업이 끝난후에 우리가 도망 나올 길이 천길 낭떨어지니 조심을 해야하고 요..

가자! 산으로! 대전의 산으로!

한밭 땅에 들어와 산지 어언 30여년 시내버스표 한장으로 거의 매일 산을 찾지만 그동안 올라서 본 산봉우리는 불과 200여개 그것도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다 올라본 봉우리는 20여개에 불과하다. 한밭벌을 둘러싸고있는 두 겹의 산줄기에는 봉우리라 일컷는 꼭지점이 400개가 넘으니 평생을 올라도 대전의 산봉우리 모두를 다 못올라 볼것 같아 나는 매일 산에오른다, 하나의 봉우리라도 더 올라보고, 하나의 물길이라도 더 걸어보고, 하나의 사연이라도 더 들어보려고... 연분홍색 진달레 향기를 맡으며 산기슭을 타고 올라오는 노란색에 가까운 신록을 보았든가? 계곡을 흘러 내리는 물소리 들으며 솔향기에 취한 체, 솔솔바람 불어오는 능선길을 걸어 보았는가? 빨간 단풍잎을 입에 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낙옆 쌓인 산..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내며

그가 내가슴깊이 들어와 앉은 때는 1968년 이었다. YS와 부딛힌 원내총무 대결에서 한창 민감한 청소년기의 고등학생 눈에는 그는 바로 영웅이었다. 71년 대통령 선거유세때 대구 수성천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청중들은 마을마다 버스로 모아온 공화당의 동원 청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40대 기수 김대중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었다. 그래서 야당도시 대구와 경북에서 그는 51%의 득표를 얻었지만 타지역에서의 득표 탓인지 아니면 부정개표 탓인지, 51대 49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었다, 동해의 물귀신이 될 뻔 했던 그가 되살아 나왔을 때, 끓는 피 두주먹을 불끈 쥐었었고, 스물을 넘은 내 가슴깊이 휘몰아친 유신독재는 문세광이 저질렀다는 영부인의 시해사건 마저 나를 못믿게 하였지만, 유신의 심장..

친일이냐? 독립운동가냐?

머리와 가슴을 아무리 굴려 봐도 보이는 건 희미한 님의 그림자 느끼는 건 잡히지 않는 님의 허수아비 보이지 않고 만질수 없는 님들이 엮어놓은 허무맹랑한 홀로서기 독립 이야기 글자 한자 고치면 될것을 무얼 그리 애태우며 전부를 뒤집을려고 하나? 고친 한자가 가슴속 깊이 박혀 먼 훗날 네 아버지, 네 할애비 독립유공자 만들어 드리면 서훈도 받고 공적비도 새우고 국립현충원에라도 모시게 된다면... 그래 잊자 네 할아비 모습은 잊자 유성땅 갑동 갑하산 한자락이 고향산천 보다 더! 고향답고 남보기에 더 보람된다면 효평동 삼거리에 우뚝서있는 공덕비는 그 값어치를 다하였을 것을... 고쳐진 옛 예기는 바람속에 묻혀 배고개 넘어 저멀리 심곡, 효뜰, 갈밭에 흩 뿌리리라 대청호 푸른물위에 새끼손가락 걸며 맹세하지 못할지..

노무현 전대통령을 되돌아보며

2009년 4월은 내게 정신적으로 너무 잔인하다 1979년 4월은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봄이 오는가 하였었다 신군부 군화발에 짓밟히고 최류탄에 쫓기면서도 목놓아 외치던 군부독재타도는 민주산악회를 모태로 생겨난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삶의 보람으로 이어졌었다 광주의 잔인한 봄이 지나고 해마다의 봄은 계속 힘들었으나 1987년 봄까지 이어진 고난의 세월은 6.29 항복선언으로 보람도 있었다 민추협의 와해속에 치러진 87대선은 형님먼저,아우먼저 양보가 아닌 욕심에 거덜나더니 삼당야합으로 이어받은 정권은 작은대통령의 전횡과 외환위기로 무너지고 세번의 낙선과 세번의 은퇴선언을 뒤집고 올라선 정권도 세아들의 욕심이 망쳤고 돼지저금통과 수도이전 깃발을 들고 인터넷 세대를 사로잡은 상고출신 노동변호사,국회의원 딱한번에..

구룡산 삿갓봉에서

거칠 것이 하나 없이 탁 트인 삿갓봉에 사방을 둘러 싼 찬란한 붉은 장막 그 속에 같혔으니 바로 내가 신선일세 땅거미가 짙어지고 밤하늘에 별이 뜨면 정겨운 님과 함께 술잔을 높이 들자 오작교를 넘나 들며 정담도 나눠 보자 새벽 닭 울음소리에 미리내는 사라지고 서쪽 하늘에는 샛별이 빛나는데 또 다시 붉은 장막은 마루금에 드리우네 사랑하는 벗들이여 흑룡의 등을 타고 저 찬란한 해를 향해 힘차게 날아보자 가슴속에 품은 큰뜻 하늘 높이 펼쳐 보자 2011년 1월1일 구룡산 해맞이 비박을 마치고

석호리 찬가

옥천 군북 소정리의 문박골 물길따라 돌거리 고개 밑의 옥색 물감 퍼 담은 뒤 석호리 함치 지나 아사골에 접어 든다 입춘 지난 꽃샘 추위 귀때기를 때리지만 쨍그랑 소리내며 깨어질듯 파란하늘 두둥실 뜬 저 구름은 막지봉을 넘어가네 청풍정 추녀 끝에 매어 달린 고드름은 고균선생 눈물인가 기생명월 눈물인가 열길 절벽 바위에다 아픈 상처 남겨 놨네 물 건너 장고개의 깎은 절벽 바위위엔 명주도포 걸쳐 입은 왜가리가 날아 들고 진걸 포구 뱃사공은 그물질이 바뻐진다. 2016.2.15 丙申年 정월 초 여드렛날 옥천 군북 석호리 대청호반에서